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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윤족들에게 또 올태니 조용히 기다려 달라는 ! 에게 상당한 보상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 극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말을 남기고 떠났다.’ | 라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I κ}는 당시 사상 검사로서 공산주의는 처벌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사건 현장을 다녀간 | 그러나 이듬해 발생한 5 . 16 쿠데타는 이 | 만으로 뿌리 뽑혀지 않는다는 신념 아래 대한 뒤로 문경 양민학살은 철저히 은폐되고 말았 | 를 완전히 뒤엎었다 유족 대표 채홍락 · 이 | 민국 국민으로 그들을 포용하기 위해 국민보 다그라고 이의승 문경경찰서장과 이기용 산 | 시형 · 채의진 씨롤 포고령 18호 ‘반국가행 | 도연맹안올 내놓았다.49년 4월5일 결성돼 1 북면 지서주임이 직위해제 당하는 선에서 이 | 위’ 혐의로 구속해버린 것이다. 현채 석달부 | 년 만에 35만명을 가입시켰다. 세계 사장사에 사건은 내부에서 매듭지어졌다 I 락 학살 현장에는 6가구 20여 명의 유족이 | 유례없는 성과로 외국연들도 조사해갈 정도였 유족들은 이후 자유당 정권의 공포 정치 | 살고 있다. 이들은 지난 88년 유족회를 다시 | 다. 50년 6월5일에는 보도연맹원 3만명이 서 아래서 압도 벙긋 못하고 한을 간직한 채 살 | 결성해 각계에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피해 | 울운동장에 모여 1주년 기념식을 정대허 치렀 아가다 이숭만 독재권력이 무너진 4 . 19 직 | 보상을 요구하는 진정을 계속하고 있다, 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서 보련 소속원이 적 후 각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하여 60 I . _ h , j_ÞLlIWQU •• iZt 에게 동조한다는 유언비어 때문에 경기도 이 D ;t_ þ ~l_ '1~ 1. 룰렐썰훨팔펄힐훌-.1 년 6월3일 자유당 · 민주당 "소속 각 1명 I F ?sndZ _ ' ___ ' I 남에서 억울한 학살이 벌어졌다.’ 씩으로 구성된 국회 진상조사반이 조재천 의 I 6.25 발발 직후인 50년 6월28일~8월31 I 오씨는 6.25 때 서울에서 미처 피난가 원을 반장으로 학살 현장에 가 약 2시간 동안 | 일 수원 이남 전국 각지에서 떼여만 명의 민 | 지 못한 군경과 그 가족들。1 i의외로 많이 조사를 벌였다. 그뒤 조사반은 “이 학살은 정 | 간인이 퇴각하던 국군 · 경찰 · 우익 단체에 | 살아남았던 것은 보란 사람들의 도웅이 컸 부에서 알고도 그 뒤를 흐려버렸다는 증거와, I 의해 학살당한 사건이다. 국민보도연맹(약청 | 었다며, 수원 이남에서의 무차별 학살은 ‘불 학살 부대를 안내해온 2명의 인근 주민을 찾 | 보련) 이란 49년 4월5일 결성된 천향자 조직 | 행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보련원은 아북에 아냄으로써 앞으로 5대 국회가 이 자료를 토 l 을 일걷는다. 당시 아름난 ‘사장 검사’로 국민 | 서도 반동으로 규정해 인민군에게 숙청하라 대로 학살 부대와 그 경위를 규명해야 할 것 ! 브도연맹안을 입안했던 오제도 변호사(77) I 고 지시했다. 그런데도 남한쪽에서는 일부 으로 본다. 전모가드러나면 정부로부터 유족 ! 는 기자에게 보도연맹 결성 경위와 학살 비 ! 군인 · 경찰이 후퇴하면서 심사도 않고 무조 S!S.A. JO:".JRNAL 1993.7.8 43 ? 니 1 i q 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