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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보도자료 1949년-2010년] 주진국 롱퍼|이지 느낌이 있는 글 이처럼 50년 12월부터 이듬해 }월까지 훨야·해보·나산 면에서 집단 학살된 주민은 5백 24영, 가옥 소실 은 1 천4백 54호에 아르렀다. 이는 60년 국회 양민학살특열조사위원회가 현장을 방문해 조사한 결과이다. 당시 국회는 끔찍한 앙민 학살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후속 조처를 행정부에 이관했다. 그러나 이듬해 일 어난 5.16과 계속된 군사 정권에서 이 사건은 르지부자되고 말았다. 국민회의 진상조사위 구성 ... 현장 조사 오랜 침묵의 세월을 딛고 유족들이 뭉친 때는 91 년. 이들은 국회에 정월서률 LH는가 하면 전남도청어| 유 족회(회장 정진재)를 등록하고 진상 규명고} 명예 회복을 호소했다. 함평군청이 직접 친상 조사 작업에 나 선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함평군청측은 지난 2년여 조사를 통해 생존한 5중대 부대원들의 소재를 파악했고, 그들로부터 양민 학살 애 대한 .앙심 선언’을 받아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상부 명령와 잔혹성을 거론하며 정부가 진상 조사를 할 경우 기꺼이 증인으로 출석하겠다고 했다. 또 합평군측은 사건 당시의 5중대 행적을 기록한 전투상보를 입수함으로써 사건 배경과 피해 규모도 확 인할 수 있었다. 울갑산 공비 토벌 작전을 기록한 01 른바 .대보름작전’에 관한 전투상보에는 2개월간 벌 어전 이 지역 작전에서 국군은 적 1 천 5명을 사살했고, 아군 III해는 2명이라고 적혀 있다. 항평 사건 유족 과 군정측은, 이 내용 자체가 정상적인 적과의 상호 교전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앙만을 학살한 과정을 당 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현재 유족들과 함평군청이 정부에 요구하는 것도, 이처럼 확보된 영백한 증거를 정부가 확인하고 거창 사건에 걸맞는 명예 회복 조처를 취하라는 것이다. 이 지역 국회의원안 김인곤 의원은 집권당 차원에서 함평사건진상조사위원화 구성을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지난 6월 29~30일 국민회의 진상조사단이 현장을 조사했다. 새로 취임한 이석형 함평군수 도 7월 말 우선 군청 차원에서 우I 령탑 건힐 부지 3천평을 마련하기로 결정하고 건립비 10억원을 모긍하 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유족들이 정작 바라는 것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명여l 를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다. 이틀의 항변은 지난 48년간 유족이 겪은 수난과 불아익에서 기인한다 희생자 후손들이 공직에라도 진출할라치면 어김 없이 ‘신원 특이자’라는 딱지가 따라붙어 물이익을 받아왔다. 환갑 넘어 학살된 할머 LI 에게조차 ‘여자 빨 치산’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어 있고, 가옥을 불태운 뒤 집에서 수거해 간 호미와 삽이 ‘노획 무기’로 묘 사되어 있다. 5중대장 권준옥써는 70년에 증령으로 여|편한 뒤 낚시 가계를 운영하다 91 년 62서|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이한 사실은 예편 후 그가 이릉을 .권영구’로 바꾸고 살았다는 점어다. 거창 사건과 함평 사건의 공동 잭임선이라 할 수 있는 사건 당시 11 사단장 최덕신은 아이라니하게도 64년 욱한으로 망명 했다. 그후 줄곧 북에서 대남 선전의 이용 도구가 되었던 초|덕신은 현재 평양 OH국열사릉에 물혀 있다‘ T홈相 기자 http://www.bali.co.kr/feelwd/일 반/함평 학살사건 .html 01-07-19 - 1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