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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보도자료 1949년-2010년] 월야리 현장에서 등에 기관총탄을 맞고도 죽은 듯이 쌓여진 시체 밑에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실아 나왔다는 정(鄭南稍=33)씨와 당시 총살하는 임무를 맡 은 모소대장 연락병 /김일호I 1등병 때문에 학살자 중에서 제외 되었다는 정(鄭-雄 =32)씨 밀에 의하면 동 부락 우익진영의 청년들은 5중대가 들어오기 전 해보면(海保[며) 에 주둔한 5중대를 찾아 “현재 남아 있는 부락민들은 부역자 가 한 사람도 없다”고 말 해주려 떠나려던 때에 군인틀이 들어 왔기 때문에 전 부락민들은 이들 군인들에 환호 의 박수를 보내며 열광적인 환영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살려준다고 마을 뒷산애 모이라 해놓고 그곳에서 남녀 구별 없이 군 경가족과 50세 이상의 고령자 및 16세 이하의 어린애들을 구분 제외하고 나머지 부락 민들엔 앉으라고 말한 다음 담배 한 대씩을 피우게 했다. 그리고 5중대장 권대위의 권총 신호로 미리 준비해 두었던 기관총과 줄지어 있었던 총살분대의 M1소총을 면전에서 수백 발 싹 죽였는데 1차 사격에서 숨이 붙어 있던 부 락민들은 “산 사람은 일어나서 각자 집에 붙은 불을 꺼라 그래야 살려준다"는 i권I대위 말에 속아 일어났다기- 2차 사격에 대부분 죽고 3차 사걱은 시체를 총 뿌리로 헤치며 움직이는 시체에 총탄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거창r 함양/ 산청의 학살과 같이 시체를 태우지는 않고/ 그대로 방치 한 채 물러갔다 한다. 이 학삼에서 제외되었던 부락민들에겐 각자 자기 집에 불 지르게 한 후 4킬로미터 떨어진 면사무소 소재지에 피난 시켰다 처녀와 유부녀를 강간한 후 싹죽이고 부락민들의 재산을 약탈해간 5중대였기에 현 재 이 곳의 우는 어린애를 달래려면 '5중대/란 말 한마디만 하면 울던 어린애도 울음을 그치고 무서워한다고 하며 젖댁이다가 어머니란 단어(單語)보다 5증대란 단어를 먼저 배운다고 했다. 91년(1958년)도에 정부에서 지어준 후생주택 10여 동이 세워진 월악랴 부락엔 아직도 주춧돌아 수없이 남아 있고 형징이었던 마을 뒷산에는 절손되어 유가족 이 없는 농민의 무텀이 남아 있는 부락민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20여 개 있었다. 아이규환의 10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 몸서리가 쳐진다는 유가족들은 권대위의 극형 을 정부애 진정할 것이라 했다. 만일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전 부락민들이 총출동하여 전국을 샅상이 뒤져 권 대위 는 물론/ 그 가족까지 찾아내어 몰살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나 산 변 해 보 면 83년 음력 12월 5일부터 부락단위로 감행되었던 함평군 해보면(成平웹 海땀I회)의 400 n u --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