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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권 122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같이 진술하였다. “시아버지는 시고모가 해안마을에 살고 있어 그곳에 가셨는데 음력 동짓달 초4일에 경찰 이 마을에 들어와 잡아다가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아버지의 시신은 고모부가 수습하였고 현재는 삼천동에 살고 있는 분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시아버지의 제사는 제가 시집을 와서 보니 동짓달 초3일에 모시고 계셨습니다.” 278) 다음은 삼천동에 거주하면서 김판동의 묘소를 관리하고 있는 참고인 주육손의 진술이다. “제가 김판동의 아들 김홍준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김판동은 백운리 신기마을에 살다가 사건 무렵 해안마을에 있었는데 1950년 12월 12일(음력 11월 4일)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였 습니다. 시신은 작전이 끝나고 경찰이 나간 다음에 옷을 보고 확인하였다고 들었습니다.” 279) 송사리 사간동 김정기(다-2306)의 숙부 김관섭도 1950년 음력 11월 중순 손불면 북성 리 승선마을 앞에서 경찰에 의하여 주포지서로 연행되었다. 김관섭의 연행사실에 대하여 송사리 주민 김채섭은 “김관섭은 사촌동생인데 1950년 음력 11월 중순경 경찰에게 잡혀 주포까지 끌려가 경찰에게 살해되어 시신은 바다에 던져 시신도 찾지 못하였다”고 진술 하였다. 280) 나) 동정리 동정리 냉천마을 심태수(다-3645)의 아버지 심의대, 심승욱(다-7289)의 할아버지 심의 석, 심기달(다-10796)의 아버지 심현택, 281) 그리고 정병조는 1950년 12월 12일 옆 동네인 신여마을 이병표의 집에 놀러 갔다. 그때 작전을 들어온 경찰이 정병조를 제외한 3명을 마을 뒤에서 살해하였다. 다음은 심태수의 진술이다. “아버지는 한 동네 심의석, 심현택, 정병조 등과 같이 신여마을에 가셔셔 이병표의 집에 계셨는데 경찰이 주민들과 같이 당산나무 아래에 집결시켰습니다. 경찰이 아버지 일행에게 ‘어느 마을에 사느냐’고 물어 ‘냉천’이라고 대답하자 정병조를 제외한 3명을 당산나무 아래 에서 살해하였습니다. 정병조는 경찰 중에 처남이 있어 생환하였다고 합니다. 그날 신여마 278) 참고인 이춘재(김중신의 어머니) 통화보고서(2009.8.21.) 279) 참고인 주육손 진술조서(2009.3.31.) 280) 참고인 김채섭 진술조서(2008.8.21.) 281) 심현택의 아들 심기달은 다른 주민을 통하여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을 하였으나 진술을 거부하 여 조사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