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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 사실인 바 때마츰 국군 9연대가 당지에 도착하야 차 정보를 입수하고 00 와 근방 부락 일대에 수차에 걸쳐 소개를 명하였는데 일부 자유 소개한 인물도 있으나 공비협조자 또는 회색분자는 소개에 응하지 안하였으므로 적의 보급 차단과 동 부락가옥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 하야 부락인원 및 가옥에 대하야 처분한 것임 ."362) “양민은 거수하고 속히 나오라고 하였으나 전부 산간으로 도주한바 기중 일부 양민도 있으나 대부분이 야산유격대원이었으므로 사살한 것이라 함."363) 군은 미수복 지구, 즉 빨치산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던 ‘유격지대’는 곧 인 민공화국으로 간주하였으며,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 역시 사실상의 인민공 화국 주민으로 간주하였다. 수복직전 호남의 산악지대 주민은 물론 일반 주 민들도 “군경이 들어오면 젊은 사람을 전부 죽인다”고 생각하면서 군 자체를 두려워했고, 빨치산에 우호적이거나 빨치산 활동지역으로 피난 가는 경우가 많았다. 국군이 진주했을 때 많은 부락에는 인공기를 걸어놓고 있거나,364) 보 초를 세워서 군 진입 정보를 주민들에게 얄리기도 했다. 당시 정치권과 국회 도 호남 일대가 좌익세가 강한 지역으로 단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병력 과 무기의 증설,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65) 실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복 당시 호남지역 대부분은 인민군과 지방좌 익이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우선 1950년 10월부터 1951년 3 월말까지 호남지역의 빨치산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다 IF공비연혁』에는 “1950년 10월 25일 국련군이 한만국경에 도달하게 되자 ( ...... ) 호남지구에 준동 중이던 괴뢰군 약 1만여 명도 근거지를 상실한 채 유동하였다”고 적고 있다. “1951년 1월말 현재 호남지구에는 무장공비 7,000명 비무장공비 5,500명 총 12,500명 이 준동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 다}66) 1950년 10월 25일 주한 미국 대사 무초(Muccio)는 “현재 시점에서 적 362) 국군기무사령부, 『거창사건관련자료(1951).ß, 386-387쪽. 363) 국군기무사령부, 앞 책, 395쪽. 364) 참고인 강혁두 면담녹취록(2009.7.31.) 365)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후방잔적 소탕을 위한 국군증설 및 무기 강화에 관한 국회건 의안J , 1950.11.14, IT'한국전쟁사.!l 1, C25-C26. 366) “1951년 1월 31 일 현재 각 지구 공비현황을 전북지구 3,600명(무장 1800+비무장 1800), - 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