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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신광지역 수복작전에는 100여 명의 신규 경찰을 전업 받아 대대적으로 작 전을 폈다.441) 사건 당일 토벌작전 후 피난민 중 좌익혐의자 분류와 좌익혐의 자 체포는 함평경찰서 사찰형사와 각 지서 경찰 그리고 대한청년단원 둥이 담당하였다. 또 참고인 김균배는 민간인의 희생에 대하여 “승선마을 네거리에 서 살해대상 민간인 선별은 사찰형사 。。。이 지휘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함평지역민간인희생사건의 주요 발생시기인 1950년 10월 말부터 이듬해 2 월말까지 전라남도경찰국장은 심형택 경무관이었으며, 함평경찰서장은 김판 수, 이철호 경감이었다. 심형택 경무관, 김판수 • 이철호 경감은 빨치산 등 좌익세력과의 교전이 끝 난 상황에서 피난민들을 단지 빨치산 협조자로 의섬된다는 이유로, 인민군 점 령기 불가피한 상황에서 분주소장, 마을의 인민위원장 또는 구장과 인민위원 회에 협조적이었다는 이유로 비무장 민간인을 법적 절차 없이 살해한 것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2) 가혜의 위법생과 책임소재 함평지역민간인희생사건은 해방이후인 1948년부터 1951년 7월까지 함평군 전역에서 경찰에 의하여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과 한국전쟁 이전 국군에 의 하여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사하는데 있어 사건 당시 함평경찰서 경찰 과 의용경찰, 대한청년단원 등을 조사하였다. 당시 함평경찰서 의용경찰이었던 엄봉섭은 “군유산 작전은 전라남도경찰국 기동대 1개 대대 150명 이상이 작전에 참여하였고, 함평과 영광경찰도 참여하 였다. 그럼에도 경찰은 군유산이 피난민들로 꽉 차다보니 처음에는 들어가지 못하다가 좌익세력이 빠져나간 뒤에야 들어가 민간인들을 산 속 고랑으로 밀 어 넣고 총살하였다”며 “피난민에 대하여 제대로 된 한 정보만 있었어도 피해 는 줄었을 것”이라고 진술하였다.442) 작전 당시 빨치산에 잡혀 있다가 나중에는 경찰로서 지리산지구 토벌작전 에 참여하였던 참고인 김균배는 “군유산에는 무안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무호 대’라면서 총 서너 자루 정도 가지고 있었다”며 경찰이 무리하게 작전을 펴지 441) 전남지방경찰국, U'1950년 인사사령부~, 1950. 442) 참고인 입봉섭 진술녹취(2008.9.21.) - 7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