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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무렵 불갑산 용천사에 폭도들이 있었는데 식량을 구하러 마을에 내려오곤 하였다. 용천사에 있던 무장폭도 몇 명이 정탐하러 왔다가 군언인가 경찰인가 는 모르겠지만 아군에게 패하여 도주한 적도 있다. 최병열이 군인들에게 잡혀 가서 죽었다는 말은 동네 분들에게 들었다”고 진술하였다,38의 송사리 주민 김채섭은 최병열이 군인들에게 살해될 무렵 출동하였던 군인 들이 광주에 주둔하였던 제20연대 6중대라고 진술하였다. “여순사건 이전 처음에는 경찰이 작전을 나오다가 1948년 음력 8월부터 는 군인들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들어온 군인들은 광주에서 온 8 중대였고 그 뒤로는 5중대와 6중대도 자주 왔습니다, 6중대장이 저와 같은 광산 김 씨였습니다. 같은 집안이라서 베를 가져다주라고 하여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던 함정리 구봉마을까지 갔던 적도 있습니다. 최정의의 삼촌 최병열도 며칠 뒤 함정리 큰 묘소 앞에서 죽었습니다,"390) 삼천동에 살면서 학교면 사거리 이모의 포목점에서 일을 도와주던 정병조 (다-6739)의 형 정 병 선은 1948년 10월 22일(음력 9월 20일) 집 에 다니 러 오다 가 경찰에 연행되어 신광국민학교 뒤 우렁굴에서 살해되었다. 다음은 정병조 의 진술이다. “형님은 학교 사거리 이모님의 포목점에서 일하였는데 삼천동 부모님께 오다 신광지서 앞에서 경찰에 붙잡혀 월암리 연천마을 우렁굴에서 살해되 었습니다. 신광지서에 잡아놓고 연락이 와서 아버지가 돈을 준비하러 마을 에 오셨는데 그날 밤 죽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숙부님과 함께 우렁굴에 가셔서 형님의 시신을 수습하였고 음력 8월 1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 다. 최병열도 이 무렵 돌아가셨습니다, "391) 정병선이 사망할 당시 정병선의 고향인 송사리 삼천동에 살았던 참고인 최 정의는 정병선의 사망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389) 참고인 이재순 진술조서(2008.3.5.) 390) 참고인 김채섭 진술조서(2008.8.21.) 391) 신청인 정병조 진술조서(2008.5.7.)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