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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경찰이 작전을 나오면 다 죽인다고 하여 대부분 ‘거무네안골’ 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런데 숙모 최양례는 해수가 섬하여 빨리 걷지 못하 고 뒤에 처져 었다가 경찰의 총격을 받았습니다. 경찰이 산봉우리에서 총 격을 가한 뒤 마을에 들어와 무차별적으로 쏟 총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날 이 1950년 11월 27일(음력 10월 18일)이 었습니 다."332) “고모님은 송정리에 살다가 생계가 어려워 친정에 와 있었는데 1950년 11월 27일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날 젊은 사람들은 전부 피하 고 노약자들만 있었는데 경찰이 마을에 총격을 가하였습니다. 숙부가 “왜 사람들을 무대포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니 그때서야 멈추어서 더 이상 사람 이 죽지 않았습니다."333) “함평경찰서 경찰이 주변 산에서 총을 쏘고 마을에 들어왔는데 피난을 가지 못하였던 할아버지 김봉규가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였습니다. 할아버 지는 눈을 보지 못하니 별일이야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을에 계시다가 총 소리가 심하게 나자 그때서야 피난을 가다가 총을 맞았습니다."334) “숙부는 장성군 월평국민학교 교감으로 계셨는데 사건 전날 고향에 가셨 습니다. 숙부는 교감선생님이라 경찰이 들어오더라도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숙부는 강운리 상강마을 종두람에서 돌아가셨습 니다. 돌아가신 날짜는 1950년 11월 27일(음력 10월 18일)입니다. "335) 1950년 11월 27일 경찰의 대동면 강운리 송산마을 진입하였을 때 마을에 있 다가 피난하였던 참고인 김진배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사건 4, 5일 전부터 밤손님들이 ‘경찰이 진주하면 모두 죽인다’는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저는 호정마을에 피난하고 있다가 저녁에 내려올 때 돌 아가신 분들의 시신을 보았습니다. 김봉규와 손소하기는 ‘큰묵전’ 밭 아래 에서, 양동댁(최양례)은 그 아래 부근에서, 김광열은 함평-나산 간 도로에서 보았습니다. 시신은 다음날 각자 수습하여 선산에 매장하였습니다."336) 331) 신청 인 손봉수 진술조서(2008.5.22.) 332) 신청인 김영기 진술조서(2008.5.22.) 333) 신청 인 손봉수 진술조서(2008.5.22.) 334) 신청 인 김정삼 진술조서(2008.6.26.) 335) 신청인 김종철 진술조서(2009.8.5.) - 7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