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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표적이 되었고y 분주소로 끌려가 희생당하기 전에도 여러 차례 좌익들의 위협을 받았다 12끼 분주소로 끌려가 감금되어 있던 김종현은 인민재판으로 희생당했다.128) 참고인 00 O은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한 학교 친구들로부터 전해 들었는데 그것은l 당시 학다리 장터에 사람들을 불러놓고 “이 사람들을 죽일까요?"하자 그 자리에 었던 사람들이 “옳 소/ 죽입시다”하는 식의 인민재판이었고 김종현은 거기서 총살당했다)29) 참고인 000를 비롯한 마을사람들은 학다리 장터에서 김종현이 희생당했다는 소문 을 듣고 소달구지를 끌고 가서 시신을 수습했다)30) 6) 손불면 학산리 염종해 희생사건(마-4416, 1950.8.14.) 1950.8.14.(음력7.1) 손불면 월천리 농장마을에 거주하던 임종해(林鍾海, 31)가 집을 습 격한 좌익들에 의해 손불면 학산리 복학마을로 끌려가 총살당했다.1 31 ) 임종해는 농사를 짓던 사람인데 지방좌익들과 개인감정을 산 적이 있었다. 또 임종 해의 조차 000 이 해방 후 좌익활동을 하다가 안한다고 하며 어디론가 행방불명되었 는데 그런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앙섬을 품은 지방좌익들에 의해 엄종해가 희생 당했다고 한다.132) 참고인 000은 당시 누군가가 대문 앞에 임종해의 시신을 두고 갔다는 소문을 들 었지만y 무서운 상황이라 나서지는 못하고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133) 그리고 시신은 집안사람과 마을사람들이 수습했다.1용) 수 있는 허가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학교면 15개 부락에서 담배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김종현 뿐이었다고 했다. (2009.5.26) 127) ["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5.26)J ; ["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5.26)J 128) ‘함평읍 기각리 이민부 희생사건’(마-7752)관련 참고인 000는 학다리장터에서 벌어졌던 인민재판 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그에 의하면, “학다리 장날 학다리 장터 한쪽에 흙을 높이 쌓아놓고 잡혀온 사람들은 새끼줄로 대여섯 명을 한꺼번에 뒤로 묶어 쌓아놓은 흙 위에 세웠다. 그 리고는 이 사람들은 이만 이만한 활동을 한 사람들이니까 이 사람들을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하자 어떤 여자가 한 명 나왔다. 그 여자한테 총을 넘겨주면서 방아쇠만 당기면 된다고 했 는데 그 여자가 못 쏘니까 총을 받아서 다시 쏘았는데 같이 묶여있으니까 한꺼번에 쓰러졌다”고 당 시 상황을 진술했다.(2009.6.30). ‘김종현의 희생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 나 학다리 장터에서 인민재판이 있었으며 인민재판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이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129) ["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5.26)J 13이 「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5.26)J 131) ["신청인 임만택 진술조서 (2008.2.21 )J 132) ["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7.1)J ; ["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3.17)J 133) ["참고인 000 진술조서 (2009.3.17)J - 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