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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언 1950년 10월 21알, 언접하고 있는 엄다면의 면 소 채치에 였던 내무서원, 연민위원회 위원 퉁 5, 6명여 국군의 수복작전 소식을 접 한 뒤 언민군의 후퇴로를 따라 염다변 화양리 영화청에 머물렀다가 14번 국도를 따라 불갑산 방향으로 후퇴한 일이 있었다.앞) 이 상황에서 학교면 사거리에서 빨치산과 교전을 한 제3대대가 다음 날언 1950년 10월 23일 오전 11시경 수호리에 들어왔다. 3대대는 마을 앞 천자봉에서 수호리를 향하여 포를 쏘며52) 함평읍 방향으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가) 수호리 대등마을 사건 1950년 10월 23일 오전 11시경 채3대대는 패풍마을에서 2뻐n 정도 떨어진 천자봉에서 마을을 향하여 30분 정도 총을 쏘고 박격포도 발사하였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밭에서 가을일을 하다가 총소리와 박격포 소리에 놀라 집으로 들어가 대피하였다. 참고언 이기행/ 이옥례의 진술에 따르면, 이 무렵 1개 소대 30명 정도의 국 군5켜이 마올에 들어왔고 이장언 이홍범아 마올을 돌면서 국군이 들어온다고 이 야기하며 주민들의 안부를 확언하였다. 이후 14, 15명의 주민이 마을 중앙에 위 치한 이병범의 집에 모여들었다.없) 그리고 얼마 후/ 이병범의 집으로 온 3대대는 이병범, 이재봉l 이종악/ 이종욱, 이홍범y 이의범 등 6명을 마을 뒤 대딴봉으로 연행하여 총격을 가했다. 이 자려 에서 왼쪽 허벅지에 총을 맞은 이의범만 살아남았다. 사건 3일 후 제3대대는 다 시 대풍마을에 와서 정자 앞에 주민들을 모이게 한 뒤 마을의 대표 격인 나필환 에게 총격을 가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총상을 엽은 이의범에게 가져온 약을 발 라 주었다고 한다.많) 이의범은 총상 후유중을 안고 살다가 지난 1993년 사망하 였다. 나) 수호리 해동마을 사건 51) r참고인 신정식 녹취록J (2007. 10. 10.), 3-4쪽. 52) r참고인 김득천 진술조서J (2α17. 10. 12), 2쪽. 53) 참고언 이기행은 당일 마을에 들어온 국군의 숫자가 30명 정도라고 진술하였다 í참고인 이기행 진술조서J (2 1α 17. 9. 6.), 3쪽. 54) r참고인 이옥례 진술조서J (2007. 10. 31.), 3쪽; 「참고인 이기행 진술조서J (2007. 9. 6.), 4쪽. 55) r참고인 이재국 녹취록J (2α17. 10. 18.), 3쪽; 「참고인 이기행 진술조서J (2006. 8. 24.), 3쪽. - 2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