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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었으며, 무기뿐만 아니라 군수품의 보급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 다.갱) 따라서 제3대대의 초기 수복과정에서의 전투는 여러 가지 조건이 며홉 한 상태에서 치러졌올 것이라고 짐작할 수 었다. 재주 출신 참전사병들은, 2.3대대는 목포률 거쳐 함평으로 들어와 전투 를 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 주민들의 상황융 잘 알지 못했으므로 주민 가운 데 빨쳐산과 빨쳐산이 아닌 사랍을 구별하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진술하였다. 게다가 당시 군 져휘관들어 전과에 대환 압박올 심하게 했기 때문에 수복대 상 지역주민 모두를 사실상 빨치산 협초자로 간주하며 작전에 임하였다고 전술하였다.29) 제3대대 출신 참고인 유화언은, 작전 중 적과 주면의 식별기준에 대하여 “우리가 전라도에서 공비토벌올 할 때는 정규 언면군인지 공비인지는 모르 겠지만 산에서 흰옷을 업은 사람이 내려와서 좁격올 했다”라고 말했다}O) 즉 작전을 폈던 3대대에게는 흰옷을 엽은 J:s:명범한’ 주민도 언제든 자신들의 생 명을 앗아갈 적으로 칸주될 수 있었다는 것여다. 뿐만 아니라 함평 수복 직후에도 국군에 대한 빨치산의 공격은 칸헐적으 로 이어졌다. 참전사병 강성근은 “학교 운동장에 중대가 정렬해 있는데 캅자 기 총알이 날아와 중대원 1명이 맞았다?고 진술하였다. 상황01 이렇다 보니 마을에 출동을 나가 청 · 장년 남성들이 보이지 않으면 남아있는 주민들에게 눈에 띄는 대로 총격을 가한 경우도 있었다.3 1) 그러나 이들은 주민들에게 대 접을 받으면 호의적으로 대하기도 하였다.찍 2η 쩨주지역 거주 3대대 참전사병 중 송규석, 김성순, 양태일, 유화언, 이창우, 채회돈 퉁이 20세 미만 이었고 함평읍 주민 이현석도 당시 국군들이 ‘열 몇 살 정도로 어려 보였다”고 진술하였다. [ r참고인 이현석 진술조서J (2006. 8. 23.), 3쪽.J 28) 합평읍 수호리 해동마을에 들어와 주민을 연행한 3대대는 주민이 밤을 갖다 주자 주민들을 돌려 보냈다고 진술하였다. [ r참고인 이건영 진술조서J (2αη.10. 11.), 3쪽.] 29) r참고인 김성순 녹취록J (2αY7. 12. 13.), 17쪽. 30) r참고인 유화인 녹취록J (2007. 12 12), 4쪽. 31) 제주거주 참전사병 강성근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수잭을 나가보면 마을에 사랍들이 없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군인이 희생도 당하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1 올라간 사람들이 편안치 못했어요. 그럴 때는 사랍을 싹버릴 때도 있었던 거죠. 기분 이 좋을 때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고." [ r참고인 강성근 녹취록J (2007. 12 13.), 3 . 8쪽.] 3끽 참고언 이건영은/ 함평읍 수호리 해동마을에 들어온 3대대가 주민을 모아놓고 부역자 색출을 하던 중 동생이 가져온 밤을 주자 소집하였던 주민을 돌려보냈고, 또 다른 3대대는 주민에게 밥을 해달 라고 하여 밥을 차려 주자 먹고 나서 “밖으로 절대 나오지 마라y 나오면 무조건 죽는다”고 하여 살아남은 경우도 있다고 진술하였다. [ r참고인 이 건영 진술조서J (2α)6. 8. 22.), 5 • 7쪽.] - 2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