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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학교역원 들의 순직1) ( ) ( )鶴橋驛員 殉職 년 월 일 전남경찰대가 광주를 수복하고 이어 각 군 의 경찰대가 각기 자기 군에1950 10 3 ( )郡 진주하자 공비들은 월 일 군 경의 철도에 의한 수송이동을 막기 위해 학교역과 사창10 3 · ( )社倉 역 사이에 있는 엄다면 영흥리 앞의 철교를 폭파시켜버렸다 당시 학교역 보선사무소. (保線事務 보선 조역 으로 근무하던 학교면 학교리 출신 김문화 가 국도의 혈맥이 끊) ( ) ( )所 保線助役 金文和 긴 것을 안타까워하며 복구계획을 세웠다 이 때 학교역의 사정은 낮에는 아무런 방비책이 없. 는 공백기가 되고 밤이면 지방좌익들이 들끓는 인공 시기나 다름없었다. 김문화는 수장기원 장영식 조수기사 김기홍 기원( ) ( )· ( ) ( )· ( )手長技員 張永植 助手技士 金基洪 技員 정종태 조역서기 고병대 와 힘을 합쳐 폭파된 선로를 보수해 월( )· ( ) ( ) 10鄭鍾太 助役書記 高炳大 일 함평 경찰대와 그 외 철도수송을 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격분한 공비들19 . 은 일단 수복했던 경찰이 다시 후퇴한 일 밤 복구공사를 한 위의 명을 경찰에 동조했다는19 5 이유로 체포 대동면 덕산리 외덕마을 앞 구릉에서 무참하게 처단해버렸다, . 년 월 일 학교역구내에 이들의 순직을 추도하는 추도비가 세워졌고 보선사무소 전 직1951 10 20 원들이 추모제를 계속 봉행해오고 있다 월 일 함평군 일부지역이 수복되었으나 수복 후의. 10 23 치안상태는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불갑산으로 피해간 공비들이 밤이면 각 읍 면의 지서를 습. · 격하고 민가에 들어와 식량을 약탈해가기 때문이었다 불갑산에서 군유산을 거쳐 영광군 백수. 면으로 이어지는 산악지대는 공비의 아성이 되어있었다. 특히 불갑산의 공비는 더욱 발호했다 당시 전남지방에 잔존해 있던 공비는 인민군 치안대 내. , , 무서원 유격대를 망라하여 만 여명에 이르렀고 그중 만 여명은 야포 박격포, 5 7,000 1 2,000 · · 기관총 다발총 소총 주로 딱꿍총 쏘면 딱쿵소리를 내기에 붙여진 별명 으로 무장하고 있었· · ( , ) 다. 12) 불갑산 공비를 소탕하는 대보름작전 은 년 월 일 시작되어 월 일 끝났다 월‘ ’ 1951 2 20 3 25 . 2 초 향교다리 현 영수교 에서 노획된 전리품과 생포자를 군민에게 전시하였다 이후 함평은 평( , ) . 온을 되찾았다. 전쟁 동안 함평출신 인사 중 지휘관으로 전공을 세운 사람은 엄다면 출신 김두천6·25 ( )金斗千 경감이다 그는 전남경찰이 후퇴하고 있을 때 완도서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들이닥. . 치자 여 경찰관과 지방 애국청년 여명을 규합해 인민군 또는 무장유격대에 대항하였다200 100 . 월 일에는 완도의 조약도 에서 적에게 몰려 궁지에 빠져있는 낙오경찰관을 구출하는9 20 ( )助藥島 작전을 전개해 명을 구출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15 . 13) 함평경찰대2) 함평경찰대는 년 월 일 장흥군의 덕룡산 공비토벌에 참가하여 용전분투했다1951 7 29 ( ) .德龍山 이 때 참가한 경찰대는 함평경찰대를 비롯한 나주화순보성영암장흥강진광주목포무안벌교고․ ․ ․ ․ ․ ․ ․ ․ ․ ․ 12) 전남지역 공비 만 명 완전무장공비 만 명은 과장된 것으로 사실과 다름으로 다음 절을 참조바람5 7,000 , 1 2,000 . 13) 전남도지 권 쪽1 , 1982, 1069~107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