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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영대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월로 접어들면서는 밤 시부터 시까지 소위 사상학습이 시작되’ . 8 9 12 어 농사 에 시달린 농민들은 졸음 속에 자아비판이라는 생소한 용어 를 익히느라 육( ) ( )農事 用語 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월 중순부터 날마다 노력동원 이 강행되었다 평양까지 연결된다는 참호파기 작업에 동원9 ‘ ’ . 된 것이다 참호파기 작업동원과 병행하여 현물세 자료조사가 시작되었다 조 수수. ( ) . · ·現物稅 콩 벼의 낱알 수를 세는 현물세 기초 자료조사에 농민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또 불순분자 검· . 거선풍이 불었다 숨 돌릴 사이도 없는 개월의 공산치하에 군민들은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3 . 불평 불만자는 반동이라는 억압에 모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월 일 사상 처음으로 함평공원에서 인민재판이라는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가구마다8 2 ( ) .史上 명 이상 참석하라는 강제동원령에 따라 모인 군중은 곳곳에 끼어있는 붉은 완장들의 눈치를1 살피며 죽입시다 옳소를 외치며 강압에 의해 동조해야 했다 이날 재판에 회부된 사‘ . ’ ‘ ’ . 람은 여명으로 죄상은 악질반동 이었다 명이 그들의 각본대로 사형이 선고되었고 군20 ‘ ’ . 12 중들의 주시 속에 총살되었다. 이 재판이 있은 후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이라는 유행어가 생기기도 했다 월 초순부터‘ ’ . 8 면 인민위원회 민청 부녀동맹 소년단 조국보위후원회 등의 조직이 구성되었다 그리· ( )· · · .民靑 고 정치보위부는 우익인사 일제검거에 착수했다 정치보위부는 북에서 내려온 정규요( ) .右翼人士 원과 지방 좌익의 정보원 으로 구성되었다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존재였고 이들에 의해( ) .情報員 끌려 갔다하면 목숨을 잃거나 반 주검 상태가 되어 풀려났다 내무서는 유치장은 물론이고 창. 고까지 검거된 반동분자 로 꽉 찼다 이들 중 죄질이 크다고 판정된 사람은 광주교화소(?) . (光州 우리 제도의 교도소 로 이감 됐는데 함평에서는 대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함평읍, ) ( ) 2敎化所 移監 내교리 출신 김제광 등 다수가 끌려갔다( ) .金濟光 이렇게 각 군에서 이감된 수효가 월 중순경 명을 돌파했다는 당시의 기록이 있다8 200 . 7) 내무 서 유치장 광주교화소에 끌려간 사람들의 경험담에 의하면 찬과 밥은 암염 한 톨에 주먹, ( )岩鹽 크기의 밀밥 한 덩어리였고 감방은 비좁다 못해 다리를 뻗을 수가 없어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년의 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웠다 그 폭염에 다리를 뻗을 수 없는 감방의 환경은 생지옥이1950 . 란 표현이 알맞았다 그들의 소위 광주교화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월 하순에 석방한다는. 9 선전과는 달리 무더기로 호명되어 나간 후 집단 학살되었다 월 일 밤 시 그들이 철수하. 9 28 9 여 입산 한 공백을 틈타 대한구국회와 대한청년단 결사대가 형무소 정문을 부수고 수감자( )入山 들을 구출하였다 여기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함평의 김제광은 함평이 아직도 공산군의 수중. 에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귀향했다가 다시 그들에게 붙잡혀 학살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 다. 여기서 언급해야할 것은 한국전쟁 당시 좌익들에 의해 우익인사들을 포함한 많은 양민들6·25 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인민공화국 통치시기를 전후해서 여명에 가까운 우익인. 2,000 사 또는 민간인들이 학살됐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는 군경에 의해 좌익이나 민간인이 학살당. 7) 광주시사 제 권 쪽, 2 , 1980, 55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