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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장2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전쟁_ 625․ 83 을 수 없다 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월 일 선포된 조선인민공화국 은 유명무실화 되고’ 9 6 ‘ ’ 말았다. 광복을 맞은 이 격동기에 함평출신으로 도청소재지 광주에서 돋보이게 활동을 한 사람은 김 석 신광면 함정리 출신 상해 임시정부 독립투사 과 김의택 엄다면 신계리 출신 현( , , ) ( . ,金晳 金義澤 대 인물 정계편 참조 두 사람이다 김 석은 상해로 망명하여 동방피압박민족동맹 중앙위원과) . 상해 한인청년당 이사장을 지내면서 상해 임시정부에서 김 구와 함께 독립운동에 전력을 쏟고 있는 가운데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직접 건네주어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을 일으키도록 지원한 사실이 드러나 체포된 후 국내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다음 년 출옥1941 했으나 다음 해에 다시 예비 검속되었다가 광복과 동시에 풀려난 애국지사였음은 다 아는 일이 다. 광주 역시 다른 지방처럼 광복이 되자 서울에서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 부 격인 전남건준 이 조직되고 여기에 치안부 가 설립되고 그 산하에 치안대가( ) ( )全南建準 治安部 조직돼 광복 후 극도로 혼란해진 질서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는 월 일 오전 시 광주극장에서 수백 명의 청년들이 모여 광주 청년8 18 10 ‘ 단 을 결성하고 총단장 에 김 석 부단장에 주봉식 을 선임했다 김 석 단장은’ ( ) , ( ) .總團長 朱奉植 주봉식 부단장을 비롯한 단원 정성태 후에 국회의원 및 국회부의장 역임 김복실( , )· (鄭成太 金卜 북부대장 등을 대동하고 전남건준 치안부장을 찾아가 광주청년단의 조직과 취지를 설, ) ‘ ’實 명한 후 치안대를 자기들이 관할하게 해줄 것을 요구해 동의 를 받아내고 김 석 자신이( )同意 치안대장을 겸임했다 김 석은 치안대를 도청 앞 무덕전 에 사무실을 차리고 무질서한. ( )武德殿 사회질서를 수습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미군정청의 방침에 따라 발족한 전남경찰재건위원회 조직에 항의하다가 갈등이 빚‘ ’ 어졌다 더욱이 일제강점기 전남에서 가장 악질 왜경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는 노주봉. ( )盧朱鳳 이 전남경찰재건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 그 배후인, 물로 지목된 김 석 주봉식이 미군정 포고령 제 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다행히 김 구· 2 (金 등 각계의 탄원으로 풀려나왔다 그러나 피살사건에 직접 연루된 광주청년단 의 김영일) . ‘ ’九 과 정판국 단원은 살인혐의로 구속되어 김영일은 옥사했다 년 후 검거된 김( ) ( ) . 3金永一 鄭判國 이현 은 독립촉성회와 민족청년단의 진정으로 년 월 년 징역에 년 집행유예 선( ) 1948 9 3 5金利鉉 고를 받고 정판국과 함께 풀려 나왔다. 1) 김의택은 군정청의 방침에 의하여 발족된 전남경찰재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전남의‘ ’ 치안을 바로 잡는데 이바지하였다 노주봉 피살사건 이후 미 군정청은 도 고문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각 국장급을 임명할 때 경찰국장에 박명제 를 임명 경찰체제를 강화한 후 치안유( ) ,朴明濟 지를 자임하고 나선 청년단체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단원들로. . 하여금 사무실에 상주시켜 버티며 농성하면서 저항하도록 선동하고 있었다 박명제 국장은 총. 무과장 주태규 감찰과장 김의택 수사과장 박몽실 보안과장 김광섭( ), , ( ), ( ),朱泰奎 朴蒙實 金光燮 기동대장 장홍염 등과 숙의한 끝에 그 때까지 건준 치안대가 점거하고 있던 개 시( ) 19 ·張洪淡 1) 제 권 쪽 내용에서 발췌, 2 , 1980, 500~509 .光州市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