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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제 절 광복직후 함평인사들의 활약1 년 월 일 시 일황 히로히도 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1945 8 15 12 ( ) ( )日皇 裕仁 한다고 선언했다 우리가 얼마나 갈망하던 소식이었던가 우리는 일제의 쇠사슬에서 풀려난 것. . 이다 온 국민의 마음은 물론 집안과 거리에는 태극기의 물결에 휩싸여 열광과 환희로 가득했. 다.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사람들은 잽싸게 문을 잠그고 귀추를 기다렸다 이 몇 마디의 발표가. 35 년 만에 맞은 광복의 순간이었다. 이날 오후 전라남도 도청에 근무하는 조선인 직원 여명이 회의실에 모여 전남도청 조선300 ‘ 인 청년단을 결성하고 일본인이 서류와 집기들을 빼돌리지 못하게 지킴과 동시에 미군이 들’ 어올 때까지 잠정적 업무를 스스로 수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각 군청에 알려 군청에서도 자치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권유했다. 함평군 내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도 문을 걸어 잠그고 앞으로의 대책을 그들 나름대로 숙의 했다 월 일에는 거리의 벽보판에 일본인들을 안전하게 돌려보냄으로써 함평군민의 아량. 8 16 ‘ 을 보여주자 그리고 일본인의 재산을 함부로 빼돌리거나 사서도 안 된다는 내용의 벽보가. ’ 붙었다 함평은 항일사상이 그 어느 지방보다도 깊이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전쟁 참. 여자와 항일의병 색출작전 때 피해를 많이 입었던 곳이다 일본인에 대한 사무치는 감정이 높. 아 반사적으로 보복심리가 작동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칼에는 칼이라는 물리적 보복을 자행하지 않고 그들을 안전하게 보내도록 하자는‘ ’ 아량을 보이고 나온 것이다 월 일 전라남도 건국준비위원회 가 결성되고 이어 월. 8 17 ‘ ’ 8 30 일 이후 각 시 군에도 속속 지부가 결성되어 치안과 자치업무를 수행해 나갔다 우리 함평군· . 에서는 이재혁 이 위원장이 되어 건준 을 이끌어 갔다( ) ( ) .李載赫 建準 그러나 여운형 이 전국위원장이 된 건준은 당초부터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한데다 박헌영( )呂運亨 계열의 침투로 좌경화 내지 공산화되기 시작했고 거듭되는 건준자체 내에서의 헤게모니( )左傾化 장악을 놓고 박헌영계와 여운형계의 암투가 계속되는 혼란을 겪어야 했다 도선 이남. 38 ( )度線 의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월 일 인천에 상륙한 초대 군정장관 아놀드가9 8 ( ) , ‘38軍政長官 도선 이남의 조선 땅에는 오직 미군정부 가 있을 따름이고 그 이외의 다른 정부는 있( )美軍政府 제 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2 전쟁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