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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6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서 계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불갑산을 중심으로 군유산 해보면 대각리 나산면 원. , , 선리 등지를 옮겨다니며 군경의 보급로 차단 식량약탈 지서습격 차량기습 통신방해는 물론, , , , 군경에 협조한 우익인사에 대한 살인방화 등을 자행하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함평의 많은 지역이 국군에 의해 장기간 소개 되어 오랜 기간 주민들( )疏開 이 피해를 보았는데 당시 소개된 지역은 대동면 서호리연암리 해보면 광암리대각리산내리, , , ․ ․ ․ 나산면 원선리 신광면 송사리 손불면 북성리양재리 등이었다, , ․ . 함평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은 전남지역에 주둔하면서 빨치산 소탕작전을 벌였던 사단 연대의 일부 병력 년 월 사단으로 교체됨 과 함평의 경찰들에 의한 년11 20 (1951 4 8 ) 2 여에 걸친 토벌작전 끝에 완전 섬멸되었다. 이로써 사실상의 함평지방에서의 한국전쟁은 종지부를 찍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 국전쟁 기간동안 인민군에 의한 직접적인 전투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함평지역은 인민군의 주둔상태에서의 좌익세력에 의한 우익세력의 탄압 그리고 인민군이 퇴각한 후의 우익세력에 의, 한 좌익세력에 대한 보복 등으로 군민간의 불신감만이 팽배해져 갔다 여기에 공비 토벌이라는. 미명아래 행해졌던 사단 연대 중대의 월야나산해보 양민들의 학살 신광손불 지역 주민11 20 5 , ․ ․ ․ 들의 포 사격에 의한 죽음 등은 함평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피로 얼룩진 한국전쟁의 결과만 이 있었을 뿐이었다. 한편 빨치산이 완전히 소탕된 년 초부터는 치안 역시 완전 회복되어 경찰들도 정상1953 적인 업무를 집행한다. 이후 함평경찰서는 다른 지역의 경찰서와 다름없는 일상적인 업무가 진행되었으나 1980 년대의 한국의 현대사는 함평경찰서 또한 가만 두지 않았다. 민족적 비극이었던 년 월의 광주항쟁은 함평경찰서를 비켜가지 않았던 것이다1980 5 . 군부독재의 정권 탈취 야욕에 분개한 광주시민들에 의해 일어난 이 항쟁은 시위대와 경 찰간의 충돌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광주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함평의 경찰관들은 대부분이 광주로 동원됐고 이들은 도청의 외곽 노동청 앞에서 시위대와 대치중이었다 그리고 시위대의 버스가 경찰쪽으로 돌진 이. , 버스에 경관 명이 순직한 것이다 함평에서도 시대의 아픔에 젊은 넋이 희생된 것이다4 . . 당시 순직 경관들은 정충길 경장 강정웅 순경 박기웅 순경 이세홍 순경 등이었다( ), ( ), ( ), ( ) . 이렇듯 많은 굴곡의 시간을 보내면서 함평경찰서는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함평경찰서4. 소 재 지1) ∶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함평리 번지120 연 혁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