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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장7 사법과 치안_ 735 는 날이다 당시 함평에는 경찰망이 조직되지 못하고 있었다. . 국립경찰이 창립된지 개월여가 지난 년 월 일 함평경찰서도 개소되기에 이른다 초4 1946 2 13 . 대 서장으로는 함평읍 함평리 출신의 최원수 경감이 부임하고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미( )崔元水 군정 당국으로부터 차출된 특경대원 명이 함평의 치안을 담당한 것이다30 . 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중앙정국은 정치구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좌익1950 과 우익의 대립으로 한층 불안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함평 또한 그 파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치안상태 또한 극도의 불안한 상황을 보이게 된다. 이 시기 함평에서 발생했던 좌우익의 대립 상황을 살펴보자.․ 년 월 추수봉기라 불리는 농민 소요사건1946 11 . ∙ 년 월 일부터 일 사이의 남한만의 총선거 반대 투쟁1948 3 1 8 . ∙ 년1948∙ 월5 일 손불면 월천리 저수마을에 설치된 투표소 투표함 탈취 미수사건10 ∙ 년 월 이후 연대 여순사건에 가담했던 반란군의 잔당 여명의 계속된 출몰1948 10 14 100 . 년 월 일1949 1 17∙ 나산면 덕림리 백양골 계곡에서의 빨치산과 경찰지원부대와의 전투. 년 월 일1949 4 24∙ 시경 여명의 빨치산에 의한 손불지서 습격사건 이1 70 .( 사건으로 지서주 임 최차현 경위 손불부면장 김갑수 와 한청단원 명이 피살되고 지서가 소( ) , ( ) 11崔且玄 金甲守 실됨) 년 이후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인한 피해1949 . ∙ 한편 이들 사건 이외에도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하여 동족끼 리의 다툼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년 월 일을 맞게되었다, 1950 6 25 .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세는 더욱 악화되어 같은해 월 일 인민군이 영광을 넘어 함7 23 평으로 들어오게 된다 인민군 선발대는 월 일 새벽 시 김제와 고창을 거쳐 영광. 7 23 2~3 으로 진격해왔고 영광의 경찰 개중대 병력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영광에서 철수하고, 5 말았다 함평도 이와 같은 날짜에 인민군이 들어왔던 것이다. . 후퇴를 거듭하던 함평의 경찰은 영암의 덕진 작전 도중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했으며, 일부는 순천을 거쳐 부산에서 전남도경과 합류하고 일부는 완도 거문도까지 후퇴하여 수, 복될 때까지 치안담당과 전투를 병행한다. 년 월 일 경찰기동대 이철호 중대장은 대원과 함평경찰서 소속 직원1950 10 19 ( )李哲浩 등을 인솔하고 열차편으로 학교역에 도착하여 함평에 입성했으나 무안으로 다시 퇴각을 결행한다. 년 월 일 전력을 정비한 함평경찰과 군부대는 함평을 수복한다 그리고 소실1950 10 23 . 된 경찰서 건물을 대신해 지금의 교육청 자리인 함평여자중학교 교사 를 임시 경찰( )校舍 서로 사용해 치안을 담당했다. 이어 손불면을 제외한 개면의 경찰관 지파출소를 수복하기에 이른다 한편 다른 면8 . ․ 과 함께 수복되지 못했던 손불면은 년 월 일 경찰국 기동대의 지원을 받은( ) 1951 2 19面 함평경찰에 의해 완전히 수복 치안을 장악한다. 함평이 완전히 수복되고 북한인민군이 퇴각하였지만 퇴각하지 못했던 인민군 일부 병력과 지 방 빨치산들은 주로 산악지대에 아지트를 형성하고 인근 산촌과 농촌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