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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장 대한민국사 개관1 _ 53 주화와 유신잔재 청산에 대한 요구가 어느 지역보다 강하게 분출되었다 특히 민주화운동이 가. 장 두드러진 곳은 이 지역 대학가였다 년 학도호국단의 조직을 청산하고 학생회를 부활시. 1980 켜 이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전남대와 조선대 광주교대 등 이 지역 대학의 총학생. , 회는 년 월이 되자 비상계엄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하면서 연일 교내 시위와 철야80 5 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은 월 일부터 일까지 신군부의 유신부활 음모에 대항하고자 도청. 5 14 16 앞에 집결하여 대규모의 집회를 열었다. 년 이른바 서울의 봄 은 모든 사람에게 왜곡된 질서를 바로잡을 희망찬 계절이었다 정1980 . 「 」 치일정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신군부가 점차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자 학기 초 주로 학내, 문제에 집중되었던 학생들의 시위가 계엄철폐와 정치일정을 밝힐 것을 요구하면서 그해 월 들5 어 급격히 정치적으로 바뀌었지만 월 일은 전국적으로 학생시위가 수그러든 평온한 주말이, 5 17 었다 그러나 일 초저녁부터 재야인사와 학생 지도부의 검거선풍이 불어 닥쳤고 년. 17 , 1979 12 월 일 쿠데타 이후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년 월 일 시 분 임시 국무회12 1980 5 17 21 40 의에서 비상계엄확대선포 안을 의결하였다 정부의 이러한 조처에 굴복하지 않고 신군부 세력. 의 집권 음모와 유신부활 기도에 맞서 광주시민 학생들은 저항하였다, . 월 일 광주에서는 비상계엄의 확대조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광주시민에 대한 계엄5 18 . 군의 잔혹한 행위는 무장 항쟁으로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광주 인근의 시군까지도 여기에 휩 쓸리게 되었고 무참히 진압된 이후 광주전남 지역은 내적으로 분노와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 ․ 다 외적으로는 정치 경제적으로 호남지역은 더욱 소외되었다. , . 월 일 흉흉한 소문이 함평지역에도 전해졌다 그 소문만으로도 광주에서 학교에 다니는 자5 18 . 식들이나 친척들의 걱정에 함평지역의 분위기는 험악해져갔다 그렇게 걱정과 불안으로 며칠간. 을 보내는 동안 가끔 광주에서 도망 나온 학생이나 젊은이들이 함평으로 들어오면서 광주지역 의 참상이 전해지고 지역민들의 분노도 커져갔다 그러다가 항쟁이 발발한지 일 째인 월. 4 5 21 일 오후 시경 고속버스 트럭 등 여대에 분승한 광주의 시위대가 함평읍에 도착하면서 분위1 , 10 기는 급변하였다 그때 이미 함평지역 사람들의 분위기는 고양되어 있었다. . 함평읍민들은 광주에서 온 시위대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면서 시위를 벌였고 함평 신광지서 등, 을 접수하여 총기 여정 실탄 박스 등의 무기를 확보했다 이때 경찰들 대부분은 광주지역100 , 2 . 으로 파견 나가 있어서 극소수의 잔류 병력만으로는 이들을 제지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였 다 무장을 갖춘 시위대는 그날 저녁 시경 광주로 진입하려다가 계엄군이 광주 외곽지대를 봉. 8 쇄해버리자 다시 함평으로 돌아왔다. 월 일 아침 수많은 군중들이 함평읍 공원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읍내를 돌며 시위를 벌이5 22 . 다가 오후에는 시위 차량에 태극기를 꽂은 채 해남 영광 등지로 빠져나갔으며 도중에 엄다면, , 지서 무기고와 군부대를 공격하여 다량의 무기를 획득하였다 이 무기들은 이후 무안을 거쳐. 목포로 반입되었다 월 일부터 시위대는 자신들의 본부를 함평경찰서로 정하고 영광으로 통. 5 23 하는 도로와 함평다리 입구에 바리케이트를 친 상태에서 자체경비에 들어갔다 이후 항쟁이 끝. 나는 일까지 함평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27 . 군을 투입하여 광주민주항쟁을 유혈 진압한 신군부는 곧바로 정권수립에 착수하였다 정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