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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제 절 광주민중항쟁과 제 공화국5 5 직후 군부는 군단장급 이상의 지휘관들로 이루어진 육사 기 이내의 진영과 사단장급 이1026 10․ 하의 지휘관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던 정규육사 출신의 기 이하 진영간에 대립의 조짐이 보이11 고 있었다 군의 공식적인 주류의 입장에 서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 군단장급 이상의 상. 급지휘관들은 대체로 소위 온건파 로 분류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유신헌법의 폐‘ ’ . 지 새로운 헌법의 제정 민선정부의 수립이라는 경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고 이러한 경로는, , ,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기도 했다. 한편 군부내 이른바 신군부 강경파 진영은 유신헌법의 조기철폐를 주장하는 군부 상층부의 주 류에 대해 내심 반발하고 있었으며 또한 동시에 자신들의 제거 가능성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 우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감 속에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월 일 곧. 12 12 , ‘1213․ 개각 하루 전이며 장군 진급 심사결과 발표일인 월 일을 거사일로 잡아 기습적인 쿠데’ , 12 12 타를 감행하였다 군부 강경파가 정국의 실세로 강력히 부상함에 따라 이제 유신헌법의 폐. ‘ 지 새로운 헌법의 제정 민선정부의 수립 이라는 경로는 표류하게 되었고 향후 정국의 변화, , ’ , 는 군부의 움직임에 달려있게 되었다. 신군부는 국내외의 모든 정보망을 장악하면서 권력의 핵심을 손에 넣었지만 당장 표면에 등장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권력의 배후에서 실세를 장악한 채 자신들의 권력을 제도화할 수 있는. 길을 암암리에 모색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대라는 물리력을 포함하여 엄청난 힘을 갖고 있었지. 만 그 지지기반은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심지어는 유신체제하에서 여당이었던 공화당마저도, . 민주화의 대세를 인정하고 유신헌법 철폐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속에서는 더욱 그러하 였다 따라서 이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도 권력을 장악할 수. , 도 없는 처지에 있었다 군부는 무력으로 사회운동 진영을 굴복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전면에 등장하여 명실상부하게 권력을 장악한다는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계엄확대. 517․ 는 대다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게 되자 그동안 잠재적이었던 문제점들이 봇물 터지듯 분출되었다. 년에 들어서자 월 일까지 발생한 노사분규가 건으로 년 한 해 동안의 총 분1980 4 24 719 1979 규건수 건의 배나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년 월 일 소위 사북사태가 터졌다105 7 . 1980 4 16 ‘ ’ . 국내최대의 민영탄광인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광업소에서 어용노조 문제와 임금인상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북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은 년대에 누적된 노동문제의 한 단면을70 드러낸 것이었다 또 월 일에는 부산의 동북제강에서 어용노조와 임금인상 문제로 격렬한. 4 28 분규가 발생하였다 이후 년 이 일어나기까지의 폭발적인 노사 분규와 노동운동. 1026 1980 517․ ․ 은 유신독재와 그동안의 산업화 과정에서 누적된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전남지역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지역차별 정책으로 인해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