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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장 대한민국사 개관1 _ 47 살 기타사망 등 명이란 인명피해가 있었다, 22,509 . 한일 협정과 월남파병을 거치면서 반대세력을 탄압하는데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계획․ 의 효과적인 추진을 무기로 삼아 장기집권을 꾀했다 년 월 윤보선과의 재대결에서 압승. 1967 5 한 박정희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에 번째 도전하였다 박정희는 년 월 박빙의 차로3 . 1971 4 신민당 김대중을 물리치고 다시 집권하였다. 그리고 년 월 국가비상사태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공포하여 국민의 기본권1971 12 제한을 가하면서 독재정권을 공고히 했다. 나아가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실현하기 위해 년 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모든 정치활동1972 10 을 금지하는 한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간접적으로 선출하도록 하는 유신헌법을 제, 정 공포하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그 통치기구가 무소불위의 전제권을 행사하는 유신독재가 전, . 횡을 부리게 되었다 광폭한 독재정치는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나 년 월 일 박정희 대. 1979 10 26 통령이 자신의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당하게 됨으로써 종말을 고했다. 이후 등장한 군사정권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공산주의에 대결할 수 있는 실력516 , ․ 배양 즉 경제건설에 최대의 역점을 두었다 경제건설의 기본방향은 외국자본을 도입하여 공장, . 을 짓고 생산된 물건을 수출하여 자본을 축적해 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냉전체제하에서. 자본수출과 국제 분업을 노리고 있었던 미일의 전략과도 맞아 떨어져서 수차례에 걸친 경제개,․ 발 개년계획으로 미일의 경제구조 속에 깊숙이 편입되어 갔고 그에 상응하여 정치면에서는 개5 , ․ 발독재가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제 차 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화당 정권은 외자 도입을 위해 한일회담과 월남파1 5 (1962~1966) 병 과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였다 당시 정부공식 통계에 의하면 남한 총인구 만. 2400 명에 실업자 만 이었다 이런 실업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산업의 발달이 필요한데 여기에250 , , 필요한 자본이 없어 외자도입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정부는 외자도입의 일환으로 독일에 지하. 에서 석탄을 캐야하는 탄광노역 광부와 병원에서 죽은 시체를 하루 종일 알콜 솜으로1000m 닦아야만 하는 간호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년 광부 명 모집에 지원자가 만 여명. 1963 500 4 6000 이나 몰렸는데 상당부분이 대학졸업자와 중퇴자였다 년부터 간호사를 파견하였는데. 1964 , 광부 여명 간호사 만 여명이 파견되어 이들이 눈물의 빵1963 - 1978 7800 , 1964 - 76 1 30 을 먹으면서 보낸 송금액기 연간 만 달러나 되었다 년 박정의 대통령이 외자 도입5000 . 1964 차 독일 방문시 파독 광주 간호사 만남의 자리는 눈물의 바다가 되어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동 행했던 독일 뤼브케 대통령 이 차안에서 자기 손 수건을 박정희 대통령이 눈물을 닦도록 주“ ” 었고 정부는 파견 광부 간호사들의 급여를 담보로 차관을 들여올 수 있었다, . 한편 정부는 억 천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하여 수출주도형의 공장건설을 추진하였다 년2 6 . 1964 에는 수출산업단지조성법과 수출진흥종합시책이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년에 천 백만 달. 1960 3 3 러에 불과하던 수출이 년에는 억 천만 달러로 증가하여 연 의 성장률을 보였다 그1966 2 5 , 44% . 렇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식료품 원료 경공업품 등 외화 가득률이 낮은 상품이 주종을 이루어, , , 국제수지의 개선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제 차 계획은 외자 의존도가 에 이르는 가. 1 60% 운데 연평균 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하였다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