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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발표했다 위원회에 따르면 불갑산 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은 지난 년 월 함평군 해보면. 1951 2 불갑산 일대에서 국군 제 사단 연대 대대와 경찰의 공비토벌 과정에서 함평 영광 장성지11 20 2 역 주민 명이상이 빨치산이나 빨치산 협력자로 몰아 현장에서 사살했으며 출산을 앞두고 미90 쳐 피난을 가지 못한 임산부와 그 가족들을 사살하거나 노령으로 인해 마을에 남아있던 집에 불울 질러 살해하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제 대대장은 적 천 명을 사살했다고 연대장에게 보고했으나 작전 관련 기록에는 적2 1 5 20 의 규모를 명으로 기록하고 있어 사살된 적 천 명에는 불갑산 일대에 피난중인 다수의350 1 5 민간인들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규명에 따라 국가의 공식사과와 위. 령사업의 지원 군인과 경찰을 대상으로 평화인권교육실시 등을 권고했다. 년 월 일 측과 공산군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1953 6 18 UN 26,000 여명을 석방하였다 당시 광주의 제 포로수용소에 있던 자들은 광산 나주 함평 영광 등지로. 5 , , , 분산 수용되었는데 함평에는 약 백여 명이 수용되었고 그들 가운데 명이 함평에 정착하였, 5 , 58 다 또한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의 약 여세대가 함평에 정착하게 되었다. 200 .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한정부는 그동안의 단독정부건설 과정에서 반대 입장을 취하였던 인사들 을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년 월 일 결성했다 이른바 좌1949 6 5 . 익성향이 있는 사람들이나 좌익단체에 가입했던 사람들을 모아 그들의 사상을 교화하는 한편 보호한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이에 따라 보도연맹은 남로당원을 비롯하여 전평 인민위원회 민. , , 주주의 민족전선 전농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등 좌익단체의 주요 구성원이 대상이었다 이들, , . 은 경찰 등의 사찰기관에 협조를 해야하는 반강제적인 의무가 지워졌고 일 내지 일 간격으, 7 10 로 민주주의 교육 등을 받으면서 경찰서나 파출소의 야간경비를 서기도 하고 좌익인사들의 색 출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러한 보도연맹은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교육이나 반공시위 등 이외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단지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명목으로 떼죽음을 당하게 되었, 다 인민군이 전남지역을 정복한 후 유가족들에 의해 광주시 광산구 치평동에서 구의 시체. 499 를 찾아내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경찰이나 그 가족들에 대해서 피비린내 나는 보복행위를 가함. 으로써 이웃 간의 갈등과 아픔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현상은 각 지역이 거의 공통된 현상이었. 다. 전쟁은 물질적인 면보다도 오히려 정신적인 면에서 우리 민족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놓625․ 았던 것이다 전쟁 자체가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밀고 밀리는 와중에서. , 낮에는 국군이요 밤에는 인민군이라는 식으로 민중들은 일방적으로 어느 한 쪽을 선택하도‘ ’ 록 강요당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갔다 상호간에 피 점령. . 지역의 주민들은 점령자가 서로 바뀔 때마다 부역자라는 명목으로 되풀이하여 처벌당하였던 것 이다 그리하여 민족분단의 비극은 단순한 정치군사적 분할이 아니라 남북한 모두 내부에서 상. ․ 호 불신과 원망을 초래하는 등 치유하기 어려운 정도의 깊은 상처를 남겼다 뿐만 아니라 이후. 통치 집단은 이것을 오히려 지배수단으로 교묘히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