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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소 강대국이 남북 양쪽에 자리 잡고 이념의 확장과 지배를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세력과 이를 봉쇄하려는 상항이 지속되고 있다 소련을 등에 업고 이념의 확장을 위해서 전쟁이. 6·25 일어나 우리민족에게 크나큰 상처와 비극을 가져다주었다. 의 피해는 말할 수 없고 저희 함평에서도 대 참극이 벌어졌다 전쟁발발 한 달도 못 된6·25 . 년 월 일 인민군이 함평에 진입하여 년 월 일 수복 될 때까지 개월간 지배1950 7 23 1950 10 23 3 하였다 그러나 함평군의 치안은 아주 불안한 상태였다 양민학살의 직접적인 계기는 국군 제. . 사단 제 대대 중대 군인들이 중대장 권준옥의 지시에 따라 무자비하고 천인공노할 만행을11 2 5 저질렀는데 년 월 일 해보면 금덕리 주둔 제 중대가 장성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 1950 12 2 5 해 가던 중 해보면 계림리 시목마을 뒷산에 진을 치고 있는 공비들과 온 종일 전투하는 중 제5 중대원 명이 전사하였는데 당일 후송치 못하고 다음날 후송조치하기 위해 전투지역에 갔을 때2 시신이 난자당함을 보고 분개하여 학살극이 자행되었음을 당시 제 중대원 경주 영천출신 김추5 길과 송기봉이 증언하였고 양연언 현재 제주 거주 이 증언하였다 김영택의 한국전쟁과 양민학( ) . 살에 대한 발표문에 양민은 좌익도 우익도 아닐뿐더러 그러한 성향을 가질만한 지식이나 의“ , 식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좌우익과 전연 관계가 없는 노약자나 부녀자들이었다 당시. . ” 이들은 문맹자가 대부분이고 언론매체로부터 접근이 어려운 사람들이고 교통이 불편하여 통행, 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어서 공산주의가 머고 민주주의가 어떻고 따지거나 논할 처지 의 사람들이 아니다 속된 말로 표현하면 시골 무지렁이들이다 이들이 제 중대가 주둔하는 근. . 5 방에 살았다는 죄 때문에 지나가는 길목에 살았다는 죄 때문에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다. . 년 월 일 새벽 월야면 정산리 장교리 동촌마을에 총을 쏘면서 집에 불을 지르고 주민1950 12 6 들에게 살고 싶으면 마을 앞 논으로 모이라고 외쳐대 추위와 무서움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기 관총을 난사하였고 인근 마을 주민들은 모두 달아나다 계림리 죽림마을 뒷산에서 붙잡은 여20 명을 학살하여 당일 여명을 학살하였다70 . 년 월 일 오전 시경 해발 의 월악산 자락에 자리한 월악리 개마을 지변 동1950 12 7 8 164m 7 , 산 괴정 송계 순촌에 중대장 권준옥이 인솔한 부대는 마을 주민 여명을 남산뫼로 끌고, , 5 200 가 사살하였다. 년 월 일 월야면 월야리 외치마을에서는 가정별 장자만 명을 뽑아 안면있는 명은1950 12 9 22 2 살려주고 명을 해보면 두리샘 뒷산에서 사살하고 나산면 이문리 사정마을 주민학생 여명17 , 10 을 이문초등학교에서 사살하였다. 년 월 일 해보면 상곡리 마을 주민 명을 사살하고 월 일 우치리에서 명이1950 12 12 12 , 1 14 36 살해되었다. 년 월 일 국회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총 명중 월야 명 해보 명 나산 명으1960 6 8 524 350 , 128 , 46 로 집계되었다 이 엄청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년 월 일자 한국일보 조간. 1960 5 20 과 석간에 있 따라 보도됨으로 처음 드러낸 다음 제 대 국회에서 년 월 일 함평출신4 1950 5 23 국회의원 김의택의 청원에 의해 특위가 구성되었는데 전남 반은 유옥우 의원 무안 박영배 의( ), 원 대전 의원 나주 이고 조사기간은 년 월 일부터 년 월 일까지 일( ), ( ) 1960 5 31 1960 6 10 11李社炯 간이었다 전남 반 특위위원 함평현지 확인 과정과 피해정도를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