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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장2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전쟁_ 625․ 297 제 절 반공포로 석방과 함평 정착6 전쟁 후 광주에는 제 포로수용소 와 중앙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제 포로625 5 ( ) . 5第五捕虜收容所․ 수용소는 현 부대 부근의 남쪽산 기슭에 있었다 여기에는 인민군에 참전하여 포로가 되었9679 . 으나 북쪽으로 돌아가기를 반대하는 만여명의 반공포로 가 수용되어 있었다 전남대1 ( ) .反共捕虜 학교 의과대학 뒷편 간호전문학교 일대에 위치하고 있던 중앙포로수용소에는 적치기간(敵治期 에 부역했다가 입산하여 체포된 남한 출신 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곳은 포로관리) 48,000 .間 를 한국군에게 이양하기 위한 시험 케이스로 한국군이 관리를 맡고 있었다. 당시 중앙수용소장은 육군 헌병대장을 겸임한 송인섭 년까지 함평군수 재102 ( 1970~71宋仁燮․ 임 소령이었다 포로들은 철저한 조사를 거쳐 살인자와 악질 공산당원을 제외하고는 이승만 대) . 통령의 용단에 의하여 년 월 일까지 석방되었으며 이 날자로 중앙포로수용소는 해체되1953 3 28 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년 월 일 시를 기해 제 포로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만여명1953 6 18 0 5 1 의 반공포로까지 석방하는 용단을 내렸었다 결사 휴전 반대 북진통일 의 시위가 한창. ‘ ’ ‘ ’ 이던 무렵이었다 석방을 적극 반대하던 군 측과 공산군 측은 물론이고 온 세계가 깜짝놀랐. UN 었다 이날 석방된 포로는 광주 제 포로수용소를 비롯 부산 마산 영천 논산 부평 등 개 수. 5 , , , , 6 용소 명이었다26,000 . 광주 제 포로수용소의 석방은 중앙에서 파견된 임기택 중령과 수용소 경비 책임자5 ( ) 5林奇澤 한근호 중령의 계획아래 새벽 시 분경 석방 선언이 있은 후 단행되었으며 한국군( ) 1 30韓根浩 경비병들은 외등 을 모두 파괴하고 공포탄만 쏘면서 유탄 이 미군 숙소에 떨어지게( ) ( )外燈 流彈 함으로써 그들의 발을 묶어 놓았다 이같은 작전으로 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를 성공리에 석방. 5 시켰으며 석방된 포로들은 광산 나주 함평 영광 등으로 흩어져 민간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 , , 다. 함평군에도 여명이 각 읍면에 분산되어 수용되었다 이들은 바로 한국군에 입대하거나 생500 . 활터전을 찾아 각처로 떠났는데 함평에 정착한 사람은 나산면 수하리 거주 김주현 전 반공청년( 회 함평군지부장 외 명이고 모두들 생활 기반이 튼튼하게 잡혔다 이들은 매년 월 일이면) 58 . 6 18 모임을 갖고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반공 대열에 앞장서고 있으며 함평을 고향으로 여기고 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