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page

266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라 자료조사.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빨치산 자료집, 3, 1996① 『 』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한 빨치산 자료집 권 문건편 한국경찰대 일일보고서3 (3)『 』 『 』 를 참조하였다 한국경찰대 일일보고서는 빨치산의 동향 경찰과 빨치산과의 교전(1951.1.10~4.30.) . ,Ⅰ 내용을 한국경찰이 보고하여 이를 미군이 정리한 문서이다. 이 자료집 쪽에는 년 월 일 전남남도경찰국 기동대와 함평과 영광경찰서 기동대의 빨치산247 1951 2 19 토벌작전의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함평군 함평군 한국전쟁기간 민간인희생자 피해연구보고서, , 2006② 『 』 『함평군 한국전쟁기간민간인희생자피해연구보고서 이하피해연구보고서 는( )』 함평군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명 예회복추진위원회에서 년 한국현대사회연구소에 의뢰하여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함평지역에서 발2006 생한 민간인 피해실태를 조사하여 그 결과를 정리한 보고서이다 그러나 피해연구보고서는 함평군 월야. , 해보 나산면 등 개 면을 제외한 읍 면을 조사하였다, 3 1 5 . 따라서 피해연구보고서는 사건 조사에 있어서 함평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의 정황과 피해규모 등을 파악하는데 한하여 활용하였다. 호남신문사 호남신문, , 1948.7~1949.12.15.③ 『 』 광주지역에서 년부터 년까지 발간된 일간지로서 한국전쟁 이전 사건 조사에 참조하였는데1948 1949 , 함평지역에서 있었던 공비 토벌작전에 관한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특히 년 월 일과‘ ( ) ‘ . 1949 2 22 3共匪 월 일자 호남신문은 같은 해 월 일 해보면 대창리 성대마을에서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경찰 명과1 2 20 6 의용경찰 명 등 명이 전사한 사건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보도하고 있다2 8 . 연번 이름 당시나이( ) 진술일 진술 장소 진술 형태 소속 신분 주요 진술 병과가 통신이라서 개별 작전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통신계는 전신주수리- 하는 게 주요임무였음. 8 김균배 (19) 2009.8.6. 함평군청 진술 조서 함평 경찰 목포에서 학교를 다니다 후퇴 직전인 년 월 일 함평에 왔음 아버- 1950 7 19 . 지가 구장을 하여 마을에 가지 못하고 고모 댁에 피신하였음. 음력정월 일 반란군청년단원 안병문에게 잡혀불갑산으로 끌려가 사형선- 8 고를 받고 용천사 앞 운암마을 토굴에 있었음. 군유산에는 작전 다음날 갔는데 시신만 보았으며 불갑산 작전 일에는 군유- , 산으로후퇴를 하였다가 불갑산으로돌아왔음 이후 조계산으로 후퇴하였다. 가 경찰토벌대에게 잡혔음. 소재지 대행동 고모 댁에 있었을 때 낮에 왕래하면서 보았는데 군유산에서- 반란군을 볼 수 없었고 단지 무안 사람들이 경찰에 쫓겨 와서 갈 데가 없 이 있었음. 년 월 일 작전에는 양재리 장재동 주민이 대행동까지 피난을 나- 1950 12 12 왔는데 그때 경찰이 주민들을 주포까지 데려다 총살하였음. 년 월 일 작전은 현지 경찰과 경상도에서 온 기동대였음 기동대- 1950 12 12 . 는 해병대였는데 인정사정없었음 당시 손불지서 경찰력은 명 정도였으. 100 며 지서장은 한길수였음. 주포사건은 음력 동짓달 초 반란군과 경찰의 전투가 있었는데 반란군의 주- 포 점령 소식을 듣고 석창리 주민이 밥을 가지고 주포지서로 가다가 경찰 을 반란군으로 착각하여 동무 라고 하여 발생하였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