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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다 경찰 측 참고인 조사. 함평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당시의 사건 지역 주변 상황을 청취하기 위하여 사건 당시 경찰 의용경찰, , 대한청년단원으로부터 참고인 진술을 청취하였는데 결과는 표 와 같다< 4> . 연번 관련사건 성명 당시나이( ) 진술일 진술 장소 진술 형태 주요 진술 년 음력 월 경 신광면 소재지에 국군 연대 중대가1949 7 20 8 주둔하였음. 처음에는 중대가 왔으나 그 후 중대와 중대가 자주 왔음 중대는- 8 5 6 . 6 중대장이 광산김씨로 같은 성씨였음. 년 가을 군경이 함평읍을 수복하였다는 말은 면 소재지에 있다가- 1950 마을에 들어온 주민으로부터 들었으며 며칠 뒤 군인들은 영광으로 이동하였음. 이후 목포와 무안에서 올라온 빨치산 잔당 여명이 있었는데- 10 군유산에 있다가 날이 새면 불갑산으로 물러가곤 하였음 년. 1951 월 일까지 이런 상태였음2 19 . 군유산작전일에는 새벽 시경 함정리 달봉산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5 이때부터 군유산에 피난을 가기 시작하였음 군유산에 이곳저곳으로. 몰려다니면서 주민들이 경찰의 총격에 사망한 것을 목격하였음. 군유산 계곡에 숨어 있으면서 주민이 경찰에게 살해되는 것을- 목격하였음. 117 참 고 인 이용헌 (18) 2009.6.12. 참고인 자택 진술 조서 목포공업학교 학년으로 년 월 일 양재리에 경찰이- 3 1950 12 12 진주하였을 때는 양재리 장재동에 있었음. 양재리는 함평 손불면과 영광 군남면의 경계인데 년 월 일- 1950 12 12 새벽 총소리에 밖에 나가보니 피난민은 함평방향으로 밀리고 경찰은, 영광방향에서 몰려왔음. 집에서 나와 논두렁 가시덤불 속에 은신하다가 오후 시 경찰에게- 3, 4 발각되어 상막재로 끌려갔음. 상막재에 주민 남자 명과 여자 여 명이 집결되어 있었는데- 50, 60 30 그때 경찰유가족이 주민들을 선별하였음. 선별기준은 경찰유가족이 이장 한청대원 등을 선별하고 대 후반도- , 40 노인이라고 풀려나는 경우도 있었음. 이후 경찰은 선별하고 남은 주민에게 총격을 가하였는데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다가 나중에 경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여 살 수 있었음. 118 참 고 인 모원 (36) 2009.3.6. 참고인 자택 진술 녹취 구국연맹 신광면 지부장이었으며 전쟁이전 신광소학교 졸업 후- , 함평농장보습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을 하였음. 불갑산이 빨치산의 본부였다면 군유산은 지소 정도로 여순사건- 이후부터 지방좌익 여 명 정도가 있었음30 . 신광면 소재지가 수복된 것은 년 월 초였으며 신광지서는- 1950 11 계천리 계월에 있었고 함평읍이 수복되고 조금씩 좁혀 왔음. 신광 소재지 수복 무렵 삼덕리 앞 서근다리에서 빨치산과 교전이- 있었는데 그 전투에서 빨치산이 다수 죽었음. 군유산작전은 전남도경 보안과장이 지휘하였으며 함평경찰서- 보안과장은 조흥현이었으며 신광지서장은 수복직후부터 나성남이었음. 구국연맹 사무실은 경찰고지에 따로 있었는데 연맹원의 수는- 7, 명이었음8 . 119 보 급 부 대 원 임순배 (22) 2009.5.25. 해보 백양의집 진술 녹취 빨치산 보급부대원으로 선을 대주는 일을 하였는데 길을 개척하고- 안내하는 일을 하였음. 손불면에서 군유산 밑에까지 벼를 지고 두 번 정도 갔는데 산에는- 가지 않았음. 빨치산 조직은 모르고 동네에 있으면서 연락하고 심부름을 하였음- . 대동면 운교리 판교에 있었는데 연락이 오지 않으니 작전을 다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