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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장2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전쟁_ 625․ 197 일에 적 사살 명 포로 명 등의 전과21 38 , 2 192)와 월 일 장성군 북일 에서 교전10 26 (CQ 0216) 후 적 사살 명 생포 명의 전과를 올렸다 라는 기록이 있다7 , 1 ’ . 193) 대대는 이후 대대와 합동으로 영광읍을 수복한 후 년 월에서 일 불갑산 대보름2 3 1951 2 20 ‘ 작전 시까지 함평 장성 영광지역에서 토벌작전을 계속하였다’ , , . 194) 당시 국군의 상황③ 제 연대의 사병은 년 월 일 소집되어 개월간의 훈련을 받고 육지에 도착하여 부대20 1950 9 1 1 편성을 하고 작전지역으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일부 사병은 단지 주일간 제식훈련1 정도만을 받았다고 진술하였다. 195) 당시의 제 대대 사병은 대부분이 처음 전투를 접한 세의 초년병3 18, 19 196)이었으며 무기뿐만, 아니라 군수품의 보급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197) 따라서 제 대대의 초기 수복과3 정에서의 전투는 여러 가지 조건이 미흡한 상태에서 치러졌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제주 출신 참전사병들은 대대는 목포를 거쳐 함평으로 들어와 전투를 하였기 때문에 이 지, 23․ 역 주민들의 상황을 잘 알지 못했으므로 주민 가운데 빨치산과 빨치산이 아닌 사람을 구별하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진술하였다 게다가 당시 군 지휘관들이 전과에 대한 압박을 심하게 했기. 때문에 수복대상 지역주민 모두를 사실상 빨치산 협조자로 간주하며 작전에 임하였다고 진술하 였다. 198) 제 대대 출신 참고인 유화인은 작전 중 적과 주민의 식별기준에 대하여 우리가 전라도에서3 , “ 공비토벌을 할 때는 정규 인민군인지 공비인지는 모르겠지만 산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내려 와서 습격을 했다 라고 말했다” . 199) 즉 작전을 폈던 대대에게는 흰옷을 입은 평범한 주3 ‘ ’ 민도 언제든 자신들의 생명을 앗아갈 적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함평 수복 직후에도 국군에 대한 빨치산의 공격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참전사병. 강성근은 학교 운동장에 중대가 정렬해 있는데 갑자기 총알이 날아와 중대원 명이 맞았다“ 1 ” 고 진술하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을에 출동을 나가 청장년 남성들이 보이지 않으면 남아. ․ 있는 주민들에게 눈에 띄는 대로 총격을 가한 경우도 있었다. 200) 그러나 이들은 주민들에게 대 접을 받으면 호의적으로 대하기도 하였다.201) 192) 육군본부 정기작전보고 쪽, , 1970. 10, 274 .「 」 193) 육군본부 정기작전보고 쪽, , 1970. 10, 307 .「 」 194) 참고인 김영훈 녹취록 쪽(2007. 10. 25.), 3 .「 」 195) 참고인 송규석 녹취록 쪽 참고인 채희돈 녹취록 쪽(2007. 12. 11.), 2 ; (2007. 12. 11.), 6 .「 」 「 」 196) 제주지역 거주 대대 참전사병 중 송규석 김성순 양태일 유화인 이창우 채희돈 등이 세 미만이었고 함평읍 주민3 , , , , , 20 이현석도 당시 국군들이 열 몇 살 정도로 어려 보였다 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이현석 진술조서“ ” . [ (2006. 8. 23.),「 」 쪽3 .] 197) 함평읍 수호리 해동마을에 들어와 주민을 연행한 대대는 주민이 밤을 갖다 주자 주민들을 돌려보냈다고 진술하였다3 . 참고인 이건영 진술조서 쪽[ (2007. 10. 11.), 3 .]「 」 198) 참고인 김성순 녹취록 쪽(2007. 12. 13.), 17 .「 」 199) 참고인 유화인 녹취록 쪽(2007. 12. 12.), 4 .「 」 200) 참고인 강성근 녹취록 쪽(2007. 12. 13.), 38 .「 」 ․ 201) 참고인 이건영은 함평읍 수호리 해동마을에 들어온 대대가 주민을 모아놓고 부역자 색출을 하던 중 동생이 가져온, 3 밤을 주자 소집하였던 주민을 돌려보냈고 또 다른 대대는 주민에게 밥을 해달라고 하여 밥을 차려 주자 먹고 나서, 3 밖으로 절대 나오지 마라 나오면 무조건 죽는다 고 하여 살아남은 경우도 있다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이건영 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