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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중대장의 총살명령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사병들이 중대장의 명령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볼 수 있다. 가해 이유(3) 사건이 일어난 함평군 월야 해보 나산면은 빨치산 근거지였던 불갑산에서 가까운 지역이다, , . 수복이후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과 일부 지방좌익이 불갑산과 태청산으로 입산하여 인근지928․ 역에서 물자를 조달하며 중대 및 경찰과 교전을 벌였다 당시 중대는 불갑산과 태청산의 빨5 . 5 치산을 토벌하기 위하여 해보면 금덕리 문장장터에 주둔하던 초기부터 월야면 외치재의 교통요 지에서 경계초소를 운용하고 있었다. 광산군 본량면 덕림리는 당시 형식적으로 수복은 되었으나 전시 계엄이 유지되고 있었다 당. 시 명이상 회합을 할 경우 반드시 군경에 신고하도록 되어있던 당시 계엄 지침을 알지 못했3 ․ 던 덕림리 주민들은 노루고기를 먹기 위해 주막을 드나들다가 이를 수상히 여긴 중대 군인들5 에 의해 연행된 후 총살당하였다. 장교와 동촌마을의 집단 총살사건은 한새들 전투 전후로 빨치산 협력자들이 뒷산에 올라가 징과 꽹과리를 치며 만세를 부르면서 중대원을 크게 자극한 것이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5 . 또 월 일의 외치리 사건은 중대가 마을 앞의 광주 영광 간 도로가 파헤쳐진 것을 주민12 9 5 - 이 빨치산과 내통하여 저지른 짓이라고 의심하여 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118) 나산면 이문리의 경우 마을 거주자 가운데 좌익활동을 하였던 주민이 있다며 명부를 보고 선 별하여 살상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쌍구룡에 끌려나왔던 성대마을 주민들은 식량 등을 가지러. 원래 거주지였던 광암리를 자주 왕래하였다고 하는데 중대는 이를 빨치산과 내통한 것으로 의5 심하여 경찰을 시켜 틈틈이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사건 전날인 중대는 월 일. 5 12 30 어수산 방향으로 토벌작전을 나갔다가 잠복하고 있던 빨치산의 습격으로 퇴각하기도 하였 다. 119) 중대는 이날의 습격에 자극받아 성대마을의 소개민을 빨치산으로 의심하여 집단 총살5 한 것으로 보인다. 상곡리 모평마을 집단희생사건의 원인은 사건 전날 월 일 밤 모평마을 뒷산과 연계되어(1 11 ) 있는 비녀봉에서 빨치산들이 중대본부에 총격을 가한데 대한 보복으로 추정된다. 나산면 우치리 소재마을의 경우 일부 소개 피난민들이 이곳에 식량 등을 조달하기 위하여 드 나들었는데 중대는 이를 빨치산 활동으로 의심하여 마을에 들어가 남아있는 주민을 총살하였, 5 다. 대부분의 사건들이 년 월 일의 한새들 전투 이후에 발생했다는 점을 보면 함평1950 12 2 , 11 사단 사건은 월야 해보 등지의 불갑산 인근 지역 주민들이 빨치산과 내통한다고 간주한 중대, 5 군인들이 무리하게 토벌작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군인들은 빨치산에게. 피해를 입은 다음에는 한새들 전투 이후 장교동촌마을 사건이나 남산뫼 사건 또 쌍구룡 모평, , ․ 마을 사건처럼 화풀이 식으로 인근 지역 주민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정황을 확인할 수 있 118) 신청인 이용헌 진술조서 쪽 정호현 쪽 정재선 쪽 정병원 쪽 정동현 쪽, 8 , 2006.6.28; (3 ), (6 ), (4 ), (3 ). 119) 참고인 김석주 진술조서 쪽, 11 , 2006. 6.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