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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였다. 101) 중대 및 중대장 권준옥이 사건의 명령 지휘책임자라는 것은 당시 월야지서 경찰관이었던 오5 정인의 진술, 102) 월야지서장 이계필의 증언서 동 월야 해보 나산 면 선무공작대장 윤인식의, 3( , , ) 증언서에서도 확인된다. 년 제 대 국회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의 조사에서도 가해부대를 사단1960 4 ‘5 연대 중대 중대장 권준혁 라고 지목하였다20 5 ’( ) . 103) 또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한국일보『 』 년 월 일자 기사에서도 중대장을 권준옥 대위로 보도하였다1960 5 21 5 . 104) 그러나 권준옥의 인사기록카드나 자력표 등에는 중대장 근무 사실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5 . 본 사건 발생시기와 관련된 내용으로는 년 월 일 대대 장교 권준옥 을 연대 근1951 1 22 ‘2 ’ ‘ 무중대 병기장교 권준옥으로 전보했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이 기록은 년 월 일 나산’ . 1951 1 14 면 우치리 사건과 월 일 나주 동창교 민간인희생사건 발생 후 권준옥에 대한 인사조치가1 20 이루어졌다는 관련자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105) 현재 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신청인 진술에서 확인 되는 바 같 은 대대 소속이면서도 전남북의 다른 지역에서 작전을 했던 중대나 중대에 의한 피해보다2 6 8․ 중대에 의한 피해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이 사건의 지휘책임이 일단 중대장에게 있음을 입5 5 증해 준다. 당시 목격자나 경험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중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괴롭히는 일은 비일비5 재했는데 군인들을 만나면 무조건 죽이니까 군인들이 없는 곳으로 피신가야 했다, “ ” 106)고 증 언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지역 주민들은 국군들이 없는 곳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으며 따라서. , 불갑산으로 올라간 주민들 상당수도 빨치산을 따라간 좌익성향의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 해 중대 군인을 피해 피난 갔다고 볼 수 있다 참고인 윤홍병은 전반적으로 질이 나빴다5 . “ . 무시무시한 놈들이다 라고 중대 군인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학련활동을 했던 정현모는 이” 5 , “ 동 시에 낙오하거나 따라오지 못하면 죽여 버리기까지 하였다” 107)며 중대 군인들의 잔인성을5 기억하고 있었다. 중대 사병의 대부분은 전투력이 별로 없는 신참 군인이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입대5 . 후 일주일의 훈련으로 낯선 함평에 온 세의 병사들에게 문장장터에 주둔한 후 맞닥뜨린17, 8 빨치산의 기습은 위협적이었다 더구나 중대는 소대별로 야전에 참호를 파고 천막을 치고 생. 5 기를 저 부락에서 도망해 나올 때 노약자 걸린 사람들하고 말하자면 나이 많은 노약자는 빼버리고 가운데 든 사람 중, 간에 든 사람은 총살범위다 그러니까 소대장한테 연락을 해라.” 101) 참고인 김일호 녹취록 쪽, 67123436 , 2007. 2. 15.․ ․ ․ ․ 102) 오정인은 당시 중대장은 권준옥이라는 사람이었는데 한번은 회의를 하자고 해서 갔는데 한번은 책임제를 맡겨주었“( ) 는데 만약 공비로 지목받은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라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오정인 진술.” . ( , 조서 쪽3 , 2006. 12. 13.) 103) 제 대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 쪽 당시 희생자 측 증인은4 , , 1960, 15 .「 」 권준혁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듣는 과정에서 권준옥을 권준혁으로 들어서 초래된 착오로 보인다‘ ’ . 104) 마구 터지는 한국일보, , 1960. 5. 21.大虐殺 秘史「 」『 』 105) 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 사회문화원 쪽, , , 2001, 139 .『 』 106) 참고인 장두병 진술조서 쪽, 4 , 2006. 6. 28. 107) 참고인 정현모 진술조서 쪽, 9 , 2006.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