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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장2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전쟁_ 625․ 151 월 중순 함평군과 광산군의 경계지점인 월야면 외치리 인근에서 군의 이동과 초소가 운용되11 었음이 증언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91) 기록상 사건지역에서 연대 대대가 최초로 출현한 것20 2 은 월 일 함평군 해보면 구계리로 알려져 있었지만12 18 92) 위 정기작전보고 에서는 월10「 」 일에 함평지역에 진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27 . 대대는 이후 월 일에 화순군 동면 고지 소탕전을 전개하였다2 11 30 287 . 93) 위원회의 다른 조 사에 의하면 대대의 대대본부와 중대는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에 중대는 전라북도 고창에2 8 , 6 , 중대는 장성군 북부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사실이 확인되었다7 . 94) 라 국군의 함평읍 수복과 중대의 해보면 주둔시기) 5 참고인 이현석 당시 함평문화원장 의 진술( ) 95)에 따르면 함평군 함평읍에 연대가 최초로 나20 타난 시점은 년 월 일이다1950 10 23 . 96) 대대 중대가 목포에서 광주로 올라오던 중 함평군3 9 학교면 사거리 인근에서 빨치산과 전투를 한 후 함평중학교에 주둔하였고 일부는 나산면 나산 초등학교에 주둔하였다 나산면 구산리 주민 이재열 당시 청년방위대원 은 함평 쪽에서 들어온. ( ) 군인이 나산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인근 원선리에서 빨치산과 전투를 벌였다 97)고 증언 하였다. 월 일 구계리 공비소탕전 은 현지 주민을 통해 탐문해본 결과 실존하지 않은 것으로12 18 「 」 확인되었다. 98) 또 중대의 해보면 금덕리 문장장터 주둔에 대해서는 당시 중대장 연락병 김일호의 진술에5 5 서도 확인되었으며, 99) 윤인식 선 국회의원 이계필 사건 당시 월야지서장 오정인 월야지서(4 ), ( ), ( 경찰 의 진술도 그와 일치한다) . 가해주체(2) 함평 사단사건의 사건 당시 현장을 목격하였거나 인근 지역에서 사건에 대해 들어서 알고11 있는 모든 신청인과 참고인들은 가해주체로 당시 연대 대대 중대 중대장 권준옥 를 지목하20 2 5 ( ) 고 있다 당시 중대장 권준옥의 연락병 김일호는 년 월 일 가 방영한 이제. 2000 6 25 MBC『 』 「 는 말할 수 있다 사단의 사라진 작전명령서 에서 중대 중대장 권준옥 를 가해주체로 지5 ( )○○ 」 목하였다. 100) 위원회의 조사에서도 김일호는 당시 가해주체가 중대라는 것을 명확하게 진술하5 90) 신청인 양윤식 전화탐문, , 2007. 5. 15. 91) 신청인 정재선 진술조서 쪽, 4 , 2006. 5. 17. 92)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 쪽, 59, 1987, 928 .『 』 93) 화순군 동면 고지 소탕전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 쪽287 , , 59, 1987, 941 .「 」 『 』 94) 대대의 작전 관련 문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위원회의 고창지역 조사 그리고 본 사건과의 함평지역 조사 등에서2 , 주둔사실은 확인되었다. 95) 참고인 이현석 진술조서 쪽, 4 , 2006. 8. 23. 96) 함평의 수복은 년 월 일이다 함평군사편찬위원회 함평군사 년 쪽1950 10 23 . , , 1999 , 67 .『 』② 97) 함평군 나산면 구산리 이재열 중대 청년방위대원 과 전화탐문(5 ) 2007. 6. 6, . 98) 해보면 금덕리 거주 윤주원 과 전화탐문(061-323-0414) 2007. 5. 9. . 99) 사단의 사라진 작전명령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참고인 김일호, 14, 2000. 6. 25, MBC ; , 2007. 2. 15.○○ 「 」 『 』 100) 김일호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사단장 최덕신 연대장 박기병 대대장 유갑열 중대. “ , , , 「 」 장 권준옥 김일호는 중대 권준옥 중대장 연락병 중대장이 대대장한테 명령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소대장한테 전달하,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