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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장16 함평의 문학과 예술_ 1195 재인식된 그를 기리기 위해 광주광역시에서는 년 현재 제 회 임방울 국악제 에2009 17 < > 이르도록 해마다 큰 기념축제를 열고 있다. 강장원 명창( )姜章沅∙ 년 함평에서 태어나 년에 서울서 작고한 근대 판소리계의 큰 공로자이다1909 1962 . 16 세 때부터 나주의 김창환에게서 년 소리를 배우고 년을 손수 깊은 산속에 가서 득공을2 5 한 다음 세 넘어 상경해서는 이동백을 사사하여 대성한 국악인이다 년에 처음 전20 . 1933 국 명창대회에 나가서 특히 적벽가 중 삼고 초려한 대목을 장쾌하게 불러 이름을 얻었다 고 전한다 더욱이 그해 조선성악연구원이 결성되고 년에는 그 직속 창극좌가 조직되. 1936 어 박초월 김소희와 함께 출연한 창극 공연서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광복 이후 구왕실, . 의 아악단 재건에 앞장섰던 그는 년에 국립국악원이 설립되자 초기부터 국악사로 자1951 리 잡아 이론과 강습으로 국악 후진들을 길러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더욱이 그는 후에 여. 성국극단의 대표가 된 임춘앵의 언니인 함평 태생의 명창 임유앵 과( ,1913~1964)林柳鶯 부부라서 주목되고 남는다 거기에다 처형인 임임심의 딸로서 김연수 명창 부인이 된 김진. 경과 경수 자매 진경국극단 경영 뿐 아니라 처음에는 서양 성악을 하다가 국악으로 전향( ) 하여 국악원의 요직까지 맡은 그의 처남 임천수에 이르도록 두루 함평 태생의 국악가정을 이룬 터였다. 천학실 명창( )千鶴實∙ 년 엄다면 송암 출생으로 일찍부터 임방울의 판소리 창에 심취하여 배우며 실제 생1910 활에서 활용하고 즐기던 예인이었다 일찍이 명창 강남중에게서 호남지방에 전승되는 소리. 를 익혔다 그는 한국전란 전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평소 고향에서 농사와 접객 음식. 점을 경영하면서까지 창과 벅구놀이 북춤 등으로 예능을 생활화하며 이웃들에 기쁨을 주, 었다 특히 그는 즐겨 부르던 모내기나 모 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논매는 소리 등의 남. , , 도노동요 예능보유자로서 뒤늦게 년 월 일 전라남도 지방무형문화재 제 호로 지1977 10 20 5 정되었다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에도 출연하여 최우수로 선정된 바 있으나 그는 손수. KBS 후진들에게 양보할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지녔었다 노후에는 이곳 국악협회 고문으로 젊. 은 대학생 등 후진들을 위한 국악전수에 주력하다가 년대 초엽에 작고했다1990 . ∙김화선 본명 명창( , : )金花仙 如樂 년 함평 기각리 출생으로 판소리 민요 등 창의 명수로 알려진 여성국악인이다 지1928 , . 방 각지에서 판소리 창법 등을 전수해 왔다 년도 국악협회 함평군 지부를 결성한 발. 1986 기인으로서 국악의 지방문화 발전에 많이 이바지했다 어릴 적부터 판소리를 해온 그는. 대에도 국악협회 고문으로서 손수 소리를 내세우며 후진들에게 모범을 보여 왔다80 . ∙나병수 명인( )羅炳洙 년 학교면 금송리 출신으로 함평농요 의 기능보유자이다 특히 농부가 상여1923 ( ) . ,農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