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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4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종하 김성현 등 명은 중앙본부에서 국창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3 . 함평국악협회회원들은 전국 판소리 경창대회에서 많은 입상자들을 배출해 냈다 수상자. 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오명희 김종규 이상규 김유중 양삼자 박행님 김재선 정옥례 김, , , , , , , , 난희 김정배 윤덕수가 있다 이외에도 고수부문에서 최양님과 황금덕이 일반부 최우수상, , . 을 수상했고 모듬북에서는 심금섭이 입상한 바 있다, . ” 위에서 언급했듯 함평천지가 한민족의 전통음악인 판소리의 고장이었음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대강의 맥을 찾아볼 수 있다. 정창업 국창( )丁昌業∙ 조선조 후기 헌종조 설과 설 에 엄다면 성천리 용흥동 현재 용(1847~1919 1849~1889 ) ( 동 에서 태어난 정창업 은 철종과 고종시대를 풍미하던 판소리 명창이다 세 때) ( ) . 12丁昌業 박유전 문하에 들어가 년간 공부하고 년간 독공 득음했다 세 때 전주 통인( ) 5 5 , . 22朴裕全 청 대사습시에 춘향가 열창 중 서두 대목에서 나구 등에 솔질 솰솰 다음 가사를 잃어 탈‘ ’ “ ” 락한 뒤 년 동안 절치부심한 노력으로 대성한 일로도 유명하다 고창의 신재효3 . ( )申在孝 에게 사사하여 서편제의 달인으로 대성했다 여러 번 서울에 불려가 솜씨를 보인 나머지. 운현궁에서 마지막으로 감상했던 대원군으로부터 신창 으로 불렸고 오위장 벼슬을( )神唱 제수 받아 함평 현감과 동등한 종 품까지 받은 소리꾼이었다고 전한다 특히 흥보가 나6 . 「 」 심청가 중의 더늠 중타령 으로 갈채를 받았으며 문하생이던 남원의 송만갑 은( ) ( )宋萬甲「 」 동편제이던 가문을 외면하고 서편제의 정창업 국창을 따랐던 것이다 노년에는 나주군 문. 평면으로 이거했지만 그의 제자들은 당시 송만갑 김창환 전도성 정정렬 명창 등으로 호, , , 남전역에 뻗쳐 있었는데 그 여맥은 오늘에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 편이다. 임방울 국창( )林芳蔚∙ 년 나산면 나산리 대정 태생의 국창 임방울 본명 은 바로 정창업의1904 ( ) ( : )國唱 林承根 제자격인데 세 때는 광산군 송정리로 이사 갔다고 전한다 광주에서 박지현에게서 춘향14 . 가 흥보가 를 구례에서는 유성준에게서 수궁가 적벽가 를 년간 익혔다 그 후, 6 . 「 」 「 」「 」 년 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처음 김창준 송만갑의 소개로 중앙의 큰 무대에 올라 판1928 25 소리 춘향가의 쑥대머리 를 불러 명성을 얻고 수궁가 적벽가 를 완창하여 한국적「 」 「 」「 」 한과 설움으로 국민들 심금을 올렸다 당시 일본으로까지 레코드판으로도 보급된 쑥대머. 「 리 는 인기 절정이었다 요즘 임 국창이 광산 출신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당시 그를 지켜.」 본 분들은 입을 모은다 본디 어릴 적에 그의 부모가 인간계와 신계를 매개하는 일을 맡은. 샤마니즘 직업에 종사했던 신분상의 하대의식 때문에 본고장을 숨긴 혐의가 짙다는 것이 다 수많은 고을 개 가운데 첫 구절을 함평천지 부터 시작한 호남가 를 임방울 자신. (57 ) ‘ ’ 「 」 이 작곡하여 취입하고 전국을 떠돌며 절창했던 연유도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 같다. 1961 년 전북 김제의 허름한 재래시장 모퉁이에서 그는 초라하게 숨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