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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장2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전쟁_ 625․ 123 라 칭함 의 당시 신원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죽었) “ 다 말할 수 없다 등 진술하기를 꺼려하는 점도 크다” “ ” . 또한 주로 밤에 나타나는 빨치산들의 특성상 신청인 및 참고인들은 일반적으로 통칭하는 밤, “ 손님 밤사람 산사람 반란군 들에 의해 끌려가서 희생당했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 “ ” “ ” “ ” 분이었다. 따라서 희생과정 및 연행과정 등을 직접 목격한 참고인들의 진술로도 희생사건의 직접적인 가 해자를 확인하기는 불가능하였다 이 때문에 본 결정서에서는 가해주체를 지방좌익 분주소원. , , 빨치산 등으로 포괄적으로 표현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전에는 마을에서 이장을 하던 사람이 희생당한 사건이 많았고 총살이 많았다. 그리고 인민군 점령기에 발생한 사건을 보면 미처 피신을 하지 못한 경찰 의용경찰 공무원 및( ), 우익인사들 등이 분주소원을 포함한 지방좌익들에게 끌려가서 인민재판식으로 희생당했으며 총 살당한 경우가 역시 많았다 월야면 월야분주소 대동면 대동분주소 학교면 학다리 장터에서. , , 발생한 사건이 그 경우이며 나산면 나산다리에서 발생한 희생사건의 경우도 인민재판으로 희, 생된 사건임을 짐작할 수 있다.56) 인민군 퇴각시기인 월 초순경에 대동분주소에 감금되어 있던 의용경찰 및 우익인사들이 지방10 좌익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건 등이 발생했으며 함평이 수복되기 전까지 낮에는 경찰 밤에는, , 빨치산들이 활동하는 시기가 한동안 지속되어 지방 좌익 빨치산에 의한 희생사건이 많이 발생, 하였다. 인민군 퇴각이후가 되면 주로 좌익이나 빨치산들에 의해 죽창 대창 칼 절구대 몽둥이 다듬, , , , ( 이돌 로 희생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인민군 점령기 때에 비해 가족단위로 희생당) . 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경찰 이장 공무원 등을 한 당사자들보다 경찰 이장 및 그, , , , 가족이라는 이유로 희생당한 경우가 많았다. 불갑산 군유산을 끼고 있는 함평지역의 특성상 그곳을 중심으로 빨치산들이 수복이후에도 계, 속 활동하였으며 빨치산들의 활동은 월 군경의 토벌작전이 벌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1951. 2 . 나 가해이유. 희생자들은 해방 후 어수선한 좌우익의 대립 하에서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특정한 하나의 이유로 희생당했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희생당했다고 판단 된다. 한국전쟁 발발 전 함평지역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주로 마을이장이었다 그 후 인민군 점령기. 나 퇴각기 퇴각 이후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경찰 이장, , 57) 및 그 가족들 공무원 대한청년단원, , 등 흔히 우익인사 로 분류되는 사람들 및 그 가족 당시 마을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 ” , , 기독교인 교사 교장 들이었는데 희생자들은 특정한 한 가지가 아닌 여러 이유가 혼재되어 희, ( ) , 56) 이러한 각 희생지에서 진실규명대상자 뿐만 아니라 희생자 수가 더 많이 있었다고 참고인들은 진술하고 있으나 그 후, 손들이 그 지역에 살고 있지 않고 연락처를 수소문하기가 쉽지 않아 추가적으로 미신청희생자를 밝히기 어려웠다. 57) 함평지역의 희생자 가운데 이장을 했던 사람이 명이나 된다 물론 경찰 공무원을 한 사람도 명 대한청년단도16 . , 13 , 4 명이 있긴 하지만 이장을 했던 사람의 희생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