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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장16 함평의 문학과 예술_ 1143 제 절 문 학1 ( )文學 고대 의 문학 활동과 유고 및 문집1. ( ) ( ) ( )古代 遺稿 文集 인재의 고장으로 전해져온 함평에서는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유수한 인물들이 예전부터 현재까지 연이어 배출되어 왔다 하지만 특히 고전문학이나 옛 연예계의 경우는 한문과 풍. 문으로 전해진 예전 작품의 자료 접근 조사가 제약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에 들어, . 활동한 분들 역시 각 분야에 흐트러진 채 너무 많아 조사도 체계화되지 않은 면이 많다. 따라서 여기 기록하는 대상자 밖에도 본의 아니게 더러 누락될 소지가 적지 않을 것임을 감안해 두어야 한다 그것은 조사자의 노력과 함께 대상자 스스로의 협조에 관한 문제이기. 도하다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지거나 조사된 내용을 중심으로 함평고을의 문학과 예술. 에 관한 기초 작업 삼아 정리해둔다. 정개청 아호 의 우득록과 수수기( , : )鄭介淸 困齋∙ 이 분야 가운데서 맨 먼저 꼽힐 분은 일찍이 우리 고을에 고성 정씨의 입향조( )入鄕祖 로서 터를 잡고 임진왜란 이전 무렵부터 문명 을 온 나라에 떨친 곤재 정개청( ) ( )文名 困齋 이다 본디 나주에서 태어나 초시에도 여러 번 합격하여 곡성현감( , 1529~1590) .鄭介淸 등을 제수 받았으나 팔 개월 만에 스스로 벼슬을 그만 두었다 년경에 엄다면 제동에. 1567 정착하며 윤암정사 를 세워 학문에 정진하여 유학을 비롯한 역사 천문 지리( ) , , ,輪岩精舍 역학 산수 전진법 진 약학 등에 걸쳐 폭넓은 학문을 쌓았다 나중에는 임금으로부, , ( ), .戰 法 터 친히 자산서원 사액을 내릴 만큼 전국적인 규모로 여러 제자를 길러냈던 것( )紫山書院 이다. 당시 선조대왕도 곤재를 아꼈고 영의정 박순은 주정자 뒤의 한 사람 이라 칭송“ ( ) ”朱程子 한 그를 팔도도원수로 천거한 바 있으며 유성룡 또한 호남 사람 중 더 덕망이 높으며 학술과“ 행검으로 자임하였다 할 정도로 곤재는 학덕을 지닌 인재였다 일찍이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 이문을 얻어 정주학의 체계를 세운 곤재는 올곧은 선비로서 내로라하는 당대의 유학자였고 문장 가였다. 그의 유저 중 우득록 목판은 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호로 지정되고 이듬해, 1987 146『 』 에는 그 유저가 전라남도 향토문화총서 국역본으로 출간되었다 또한 년에 사액 받. 1616 ( )賜額 은 옛 서원은 그 동안 숱한 당쟁 속에서 너덧 번의 훼철과 복설을 거듭해 온 끝에 수세기가 지 제 장 함평의 문학16 ( )文學 과 예술( )藝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