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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일제의 식민치하에서 종교의 자유가 억압을 당하고 성직자들이 갖은 어려움을 당할 즈 음에 이곳의 교회들은 대체로 일본경찰들로부터 함부로 취급당하지 않았던 요인은 전남북․ 을 선교구역으로 활동하던 선교사 유서백이 당시 미국 부통령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을 한 정계의 거물급이었고 당시 전주 예수병원장이었던 린 톤 역시 차 세계대전에서 수, 1「 」 훈을 세운 미육군성의 성장군 출신이었기 때문에 일본경찰이 감히 이들의 선교구역을 침4 범하지 못했던 것이다 함평읍 강대용장로 증언.( ) 년 월 일 해방 전에 이미 있었던 교회로는 용성 함평읍 가덕 나산 궁산 산1945 8 15 , , , , , 남 구봉 옥동 영흥등 개처였고 년 전쟁이 발발하자 공산군들의 만행은 이땅, , , 9 , 1950 625․ 전역에서 자행되었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했다. 년 월 당시 함평읍교회에 출석하던 노현덕 장로 당시 함평우체국장 이기섭 장로 박1950 8 ( ), , 병연 집사 이애수 집사등 명이 함평읍 구기산에서 패주하던 공산군에 의해 첫 순교를 당했, 4 고 한편 손불에서도 손불국민학교 교장으로 재직중이던 이진희 장로 당시 산남교회 이승철 목( 사의 장남 가 순교를 당했다 그해 월 국군이 함평을 수복한 후 함평읍교회에 주재를 하며) . 10 양민과 빨갱이 색출작업을 할 때 김병두 와 전규동 장로의 확인 보증으로 많은 양민들의(83) 생명과 재산이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고 월야 해보지역에서는 김병두 전규동 외에 윤인식의, , , 현저한 헌신봉사로 많은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당시 함평군수인 박종오에 의해 전쟁고아를 위한 고아원 설립이 추진 되어 삼애원 윤인식 장로 이 맨처음 설립되었고 자광원 홍순호 장로 차례로 시온원 김( ) ( ), ( 수업 장로 성애원 모남식 장로 등이 김병두 목사의 주선으로 설립되어 전남일대의 전쟁), ( ) 고아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아울러 이 고장 최초의 사립중등교육기관인 광인고등공민학교 함평읍교회 교육관초대교( ․ 장 김병두 가 설립되어 년까지 회 여명의 졸업생을 배출시켰고 의 설) 1983 27 1,700 YMCA 립에도 교회가 모체가 되었다. 이와 같이 기독교가 이 지역에 미친 영향은 교육 선교 사회사업 등 사회전반에 걸쳐, , 지대했고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역주민들을 이끌었던 기독교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 또한 길이 남을 장한 발걸음이었다 또한 서울 남서울교회 시무목사인 홍정. 길 목사를 비롯하여 함평출신 기독교 목사들의 활동은 어느 지역 못지않은 자랑거리이다. 함평군 기독교연합회는 초교파적 조직으로서 함평의 선교 주년을 기념하는 함평군기105 독교선교 주년 기념사업회 회장 박종삼목사 함평읍교회시무 를 년 구성하여 대동면100 ( / ) 2005 용성교회에 선교 주년 기념비를 세우는 등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선교 주년105 100 기념연감도 제작보급 하였다. 년말 현재 군내 기독교 교회현황은 표 와 같다2007 < 5> . 표 함평군 교회 현황< 5> 년말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