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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는 단식 농성자와 함평고구마피해농민들을 위한 기도회를 갖고 농성자들을 성원하기도 했다. 협상이 타결된 다음 날인 일이 되었으나 두 사람은 석방되지 않았다 단식농성은 그들이30 . 석방될 때까지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월 일 저녁 시 분 광주 남동천주교회는 북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회5 1 7 30 , ‘ 원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전국에서 모인 여명의 신부들이 공동 집전한 이 기도회에는’ . 40 수십 명의 개신교 성직자 및 관련자들과 각계 사회지도층 양심인사들을 비롯한 여명이 참500 석했다 이 자리에서 조비오 신부는 단식투쟁 중인 회원들을 대신하여 구속 중인 두 사람 회. 원의 조속한 석방과 농민회 탄압을 중지하라고 강도 높게 요구했다 특히 문익환 목사는 이번. ‘ 농민들의 단식투쟁은 대한민국 민주회복운동과 인권수호투쟁사에 찬연하게 빛나는 공로를 세 웠다고 높이 평가하면서 농민들의 투쟁의식을 극찬했다 기도회가 끝난 후 여명의 양심인’ . 100 사들은 따로 마련된 자리에서 전국농민인권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이종창 농민회 지도‘ ’ 신부를 선출했다 이들은 이 위원회가 앞으로 불의와 압제의 희생물이 되고 있는 농민들의 인. ‘ 권옹호를 위해 투쟁하는 적극적 단체가 될 것임을 다짐했다’ . 협상타결 일이 지난 일이 되어서야 이상국 조봉훈 두 회원이 석방되어 단식농성장으로3 2 ㆍ 돌아왔다 무려 일 간 계속된 단식투쟁 동안 명이 의식을 잃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의. 8 6 연한 회원들의 의지가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 이제 단식투쟁을 멈출 때가 되었다 단식농성자. . 들은 지도신부들과 함께 농성을 끝내는 기도회를 가졌다 그리고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다‘ ’ . 가 이미 구속된 유남선 정성헌의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오는 월 일 춘천교구 주최로 춘천5 8ㆍ 시 죽림동성당에서 열기로 한 기도회에 모두 적극 참여할 것을 결의한 다음 단식농성을 풀면‘ 서라는 이름으로 전국 가톨릭농민회원들에게 보내는 성명을 발표하고 함평고구마사건의 대단’ 원의 막을 내렸다.  맺 음 말 너무 오랜 동안 치른 노력과 고통에 대한 보상치고는 너무나 미미했다 함평군내 전체 피. 해액은 억 여만 원으로 추산되었지만 보상액은 농협과 경찰의 간섭과 협박 때문에 최1 4,000 소한으로 신고한 만 원 전체피해액의 만이 보상받을 수 있게 되었다 피해보상309 7,085 , 2.2% . 은 함평군내 피해농가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줄기차게 투쟁해온 가톨릭농민회원 또 는 여기에 적극 참여한 농민들에게만 해당되었다 더욱이 갖가지 부대비용을 공제한 결과 어. 떤 농가는 단돈 원을 보상받은 경우도 있었다23 . 395) 보상을 받지 못한 농민들은 투쟁할 힘도 없고 배경조차 조직 없어 억울한 한 숨을 또 다시 내쉬어야 했다( ) . 396) 더욱이나 함평군 일부 농민들은 가톨릭농민회가 주동이 되어 투쟁한 보람을 그나마 얻어냈지만 그렇지 않은 무안이 나 해남 등 다른 군 농민들은 한 푼도 보상받지 못했다. 397) 이 때문에 함평고구마 사건은 다 394) 년 월 일 서경원 전화증언2009 9 12 , . 395) 년 월 일 서경원 당시 함평농민회장 증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쪽2009 5 4 , ; , 333 .『 』 396) 감사원은 그 후 개도지부에 대한 감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일부 단위농협이 주정회사 및 상인들과 짜고4 . 년 년 이태 동안 고구마수매를 위장해 횡령 착복 유용한 액수가 무려 억여 원 고구마 만1976 77 80 ( 24ㆍ ㆍ ㆍ 톤 이었음이 밝혀져 전남도지부장 명을 포함한 명이 해임되고 명이 정직 감봉 좌천 등의 징계6,000 ) 1 202 457 ㆍ ㆍ 를 받았다 동아일보 년 월 일자( , 1979 5 6 ). 397) 한국가톨릭농민회 한국가톨릭농민회 년사 쪽, 30 , 1999, 59 223~241 572 ,『 』 ㆍ 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