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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기돼 물러설 수 없는 필연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다짐했다 한국가톨릭농민회 본부 동 전남지. , 구연합회 함평고구마피해보상대책위원회는 이 같은 당위성과 필연성을 염두에 두고 지난 월, 2 일 합동회의에서 결의한대로 오는 월 일 광주 북동천주교회에서 피해 농가를 위한 기도28 4 24 ‘ 회는 물론 대대적인 전국농민대회를 개최하여 대정부투쟁 쪽으로 강화하기로 재확인했다 이’ . 에 앞서 한국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은 월 일 함평고구마사건은 농협이 민주화 되지 않은 데4 22 ‘ 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하고 농협민주화운동 결의문을 농협중앙회장에게 다시 보내 촉구하면서’ 강력투쟁을 서서히 본격화 해 나갔다. 한국가톨릭농민회와 전남지구연합회 및 고구마대책위원회는 예정대로 월 일 오후 시4 24 3 부터 광주시 북동소재 북동천주교회에서 전국 각 지역 농민 종교계 재야 및 학생운동권 인ㆍ ㆍ 사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윤공희 대주교와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단 공동 집전으로 함평750 ‘ 고구마피해 보상을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윤공희 대주교는 강론을 통해 농협의’ .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본 함평군 농가에는 당연히 그 피해를 보상해주어야 하는데도 년째 그3 요구를 외면하는 것은 농민을 위한다는 농협이 아닐 뿐만 아니라 농협의 존재자체를 의심케 하는 비열한 짓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또한 지도신부단의 이종창 신부는 이에 부연해서. 함평고구마 피해농가에 대한 보상을 하루속히 실시할 것 농민회에 대한 탄압을 중지(1) , (2) 할 것 구속된 한국가톨릭농민회 회원 두 명을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3) . 기도회가 끝난 후 진행된 부 순서에서 농민회 회원들은 본격적인 투쟁을 거론했다 이 자2 . 리에서 함평고구마사건 및 투쟁과정에 대한 그동안의 경과보고가 있었고 농협의 비민주적 작 태와 농민회 탄압사례도 발표되었다 또한 지도신부단 가톨릭농민회 전국회원 일동명의의. ㆍ ㆍ 성명서 선언문 결의문이 채택되기도 했다 기도회가 끝난 후 주최 측은 농협도지부장과의.ㆍ ㆍ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일부회원들이 농협도지부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은 이를. 강력하게 저지했다 이에 따라 회원들은 성당 뜰로 되돌아와 연좌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밤. . 시에 시작된 연좌농성은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11 . 일 밤을 새운 연좌농성회원들은 계속 연좌농성을 벌이기로 했다 경찰은 성당주변 교통24 . 을 완전히 차단하고 주위상인들로 하여금 영업에 방해된다며 성당에 항의하도록 배후에서 종‘ ’ 용해 연좌농성을 스스로 해산하도록 시도했다 낮 시쯤 농성회원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 12 었다 단식이라는 마지막 단계의 초강력수법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지도신부와 함께 명이. . 73 참가했다 전남출신 명을 비롯한 강원 경북 경남 전북 충남 등 전국 각지의 가톨릭농민. 44 ㆍ ㆍ ㆍ ㆍ 회원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비회원도 명이나 참여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명의 대학17 . 13 생도 끼어 있었다. 393) 단식 이틀째인 일 새벽부터 경찰은 성당 앞 인도와 주변을 완전봉쇄하고 일반신도들의26 새벽미사 참여까지 저지함으로써 종교의 자유까지 제한하는 단말마적 행태를 노정했다. 월 일 아침 농성회원들은 경찰이 밤사이에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내건 현수막은 물론4 27 심지어 예비자 입교환영 현수막까지 철거하고 신도들의 새벽미사 참여를 완전 봉쇄하는 종교 적 탄압까지 스스럼 없이 자행함을 간파했다 정 사복 경찰은 성당주변의 통행을 전면 차단. ⋅ 하고 성당내부에서 농성을 벌이는 회원들의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봉쇄함으로써 공포분위기 393) 조영욱 년대 함평농민운동의 연결망과 의미구성 과정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언론정보학, 1970 , 「 」 과 석사학위논문,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