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7page

제 장11 사회복지_ 1013 협민주화운동 결의문을 발표했다’ . 391) 함평농민들의 고구마피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만큼 농 협이 민주화되지 않고 관료적 독선이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어서 농협의 민주화가 시급하다는 의견이 백출했었다 그. 리고 농민대회 겸 기도회를 끝낸 회원들은 농협도지부장 면담을 위해 농협도지부 광장으로의 진출을 시도했으나 경찰 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년 월 일 농수산부와 농협중앙회가 합동으로 함평군고구마피해실태를 조사했다1977 4 25 .★ 년 월 일 농수산부와 농협중앙회가 합동조사결과의 강평회를 통해 피해사실을 인정하고 그 피해액이1977 5 2★ 고구마대책위원회 조사액수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밝히면서도 내용공개는 거부했다. 년 월 함평경찰서는 함평고구마사건타결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농민들을 연행해 조사를 벌였다1977 5 ‘ ’ . 〓★ 년 월 일 한국 가톨릭농민회 전남지구연합회와 고구마대책위원회는 농협도지부장에게 현지조사결과1977 5 17 〓★ 에 대해 질의했다. 년 월 노금노 함평가톨릭농민 총무는 서울 동대문천주교회 기도회에 참석하고 함평고구마사건을 설명했1977 6 〓★ 다. 년 월 일 한국가톨릭농민회 전남지구연합회 및 고구마대책위원회는 월 일 광주북동천주교회에서 제1977 8 5 9 5〓★ 차 기도회 및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2 . 년 월 일 전남지구연합회 회원 및 고구마대책위원들은 서울 방림방적 노임 체불사건을 위한 동대문1977 8 15 〓★ 천주교회 기도회에 참석했다. 년 월 일 전남지구연합회 회원 및 고구마대책위원들은 대전가톨릭농민회 본부회의에 참석 협조를1977 8 16 , 〓★ 호소했다. 년 월 일 전남지구연합회 회원 및 고구마대책위원들은 부산에서 열린 전국기독교청년회에 참석 함1977 8 17 , 〓★ 평고구마사건에 대한 협조를 호소했다. 년 월 일 경찰개입으로 월 일 예정된 광주북동천주교회 기도회가 무산되었다1977 8 24 9 5 . 〓★ 년 월 한국가톨릭농민회장 최병욱은 농협중앙회장에게 개 항목에 걸친 공개장을 발송하고 개항을1977 8 15 3〓★ 요구했다. 392) 년 월 고구마대책위원장 서경원은 대전에서 열린 추수감사제 및 전국농민대회에 참석하고 함평고구마1977 11 〓★ 사건 경과를 보고했다. 년 월 일 함평읍 내교리 외대화 마을에 공무원 명이 함평가톨릭농민회 회원 명의 초가지붕을 헐어버1977 12 3 8 5〓★ 렸다. 년 월 한국가톨릭농민회와 동 전남지구연합회는 함평고구마 사건에 대한 투쟁을 강력한 실력행사로 펼1978 1 〓★ 칠 것을 다짐했다. 년 월 고구마대책위원들은 월 실시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 때 함평고구만 사건을 강력하게1978 2 4〓★ 제기하여 이의 해결을 공약하지 않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말도록 권유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년 월 일 한국가톨릭농민회 본부 동 전남지구연합회 고구마대책위원회는 합동회의를 열고 월1978 2 28 , , 4 24〓★ 일 광주 북동천주교회에서 함평고구마피해 농가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뒤이어 전국농민대회를 대규모로 개최하기로‘ ’ 결의했다. 단식투쟁과 피해보상 실현4. 19 년 년에 이어 햇수로 년째인 년 월이 되었다 그래도 농협의 반응은 시큰76 , 1977 3 78 1 . 둥했다 한국가톨릭농민회와 고구마대책위원회는 더 이상 참으며 기다릴 수가 없었다 투쟁의. . 강도를 더욱 다그쳐야 했다 농가의 피해액 만원은 당시의 화폐가치로 보아 대단한 것. 179 309 은 아니었다 그러나 농민들을 무시하고 깔아뭉개는 농협은 물론 유신독제체제의 의식이 문제. 였다 이 때문에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 차원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제. 391) 한국가톨릭농민회 한국가톨릭농민회 년사 쪽, 30 , 1999, 230 .『 』 392) 한국가톨릭농민회 한국가톨릭농민회 년사 쪽, 30 , 1999, 22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