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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장11 사회복지_ 1011 해 명 서 387) 재배면적1) 1,296ha 총생산량 만 톤 톤2) 2 5000 (26,200 ) 388) 수매량3) 가 생고구마 톤 톤 초과 수매했으며 이중 톤 만 부대 은, 17,000 (5,000 1,200 (2 ) 영광 곡성 영암 등 타 지역에서 수매한 량)ㆍ ㆍ 나 절간고구마 톤, 201 계 톤17,201 잔여 량 합계 톤4) 7,799 가 종자 고구마 톤, 1,040 나 식용 판매 톤, 2,000 다 자가소비 톤, 4,000 라 개인판매, 75 그러나 이 같은 해명서는 피해농민들의 마음을 달래기는커녕 더욱 감정을 상하게 했다. 년 월에 들어서자 대책위원회는 전국 각계에 고구마 피해보상의 당위성을 강조하는1977 4 유인물을 발송하는 한편 광주시내 계림동천주교교회에서 윤공희 대주교가 집전하는 고구마피‘ 해보상의 성공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고구마피해보상대책위원회와 한국가’ . 톨릭농민회는 함평고구마사건의 심각성을 전국에 알리고자 노력하는 등 년 월부터 다음1977 4 해 월까지 년 내내 갖가지 호소문 선언문 결의문을 보내고 곳곳의 성당과 교회에서 함평4 1 ㆍ ㆍ 고구마사건 해결을 위한 기도회를 여는가 하면 전국각지에서 열리는 각종 농민단체 회의에 참 석해 경과보고와 적극적인 후원을 호소하는 운동을 잠시도 쉬지 않고 벌였다 더욱이 이들은. 농협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농협중앙회장과 정부당국에 끊임없이 보냈다 함평 농민. 들의 고구마피해를 보상하지 않는 것은 농협이 민주화 되어 있지 않고 관료적이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 전개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 389) 년 월 일 함평군농협은 함평읍 소재 신한제분과 고구마 만 톤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고1976 10 1 1 2,000〓★ 읍 면 단위조합을 통해 작년보다 인상한 값으로 수매한다는 전단을 돌려 홍보했다 아울러 생고구마는 월17.4% . 10 1・ 일부터 개월간 절간고구마는 월 일부터 개월간 수매한다고 발표했다3 , 11 1 4 . 년 월 일 함평군농협은 단위조합에 공문을 보내 고구마 생산예상량의 절반가량은 절간고구마로 출하1976 10 13 〓★ 토록 장려했다. ★ 함평농협은 생고구마수매목표량 중 톤을 절간 고구마로 수매하라고 예하 단위농협에 지시1976. 10. 21. 4,000 했다. 년 월 일 함평가톨릭농민회 관계자와 고구마피해농민 여명은 함평읍 함평리 청하식당에서 모임을1976 11 18 10〓★ 갖고 대책을 협의하면서 농민의 피와 땀이 뒤범벅이 된 고구마가 길가에서 눈비를 맞고 썩어가는 것은 곧 농민들이‘ 썩는 것과 다름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 390) 387) 년 월 일자 함평군 농업협동조합장 명의의 해명서1977 3 3 , ‘ ’安壽福 388) 함평농협이 보낸 해명서에는 년 함평군 내 생산량을 만 톤으로 표시했으나 그 안에 총생산량1976 2 5,000 2 만 톤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초 총생산량은 만 톤이었던 것을 만 톤으로 줄여6,200 2 6,299 2 5,000 공개한 것으로 추정된다 년 월 일자 안수복 함평농협조합장의 해명서(1977 3 3 , ). 389) 이 요약문은 한국가톨릭농민회 한국가톨릭농민회 년사 조영욱 년대 함평농민운동의 연, 30 , 1999 ; , 1970『 』 「 결망과 의미구성 과정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언론정보학과 석사학위논문 한국정치상연구, , 1998 ;」 회 년대 강압정치와 민중항쟁운동 동광출판사 서경원 노금노 이외 해당농민들의 증언들, -70 , , 1988 ;大命『 』 ㆍ 을 종합해 작성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