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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고구마 생산농가 피해조사서에 기록된 피해전액을 조속히 보상하라2) 우리는 불필요한 면담을 원치 않으며 서류상의 답변을 요구한다3) . 본 고구마사건에 관한 해결의 확답이 년 월 일까지 없을 때 우리 임의대로 행동한다4) 1977 1 18 .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명에 따라 피해 입은 농민의 대변인 입장에서 이 사건이 해결되지 않을 때 국민총화는5) ‘ ’ 어렵다고 보며 따라서 우리 농민회의 힘으로라도 국민총화에 총 매진할 것을 다짐한다. 385) 이러한 결의는 그 동안 각 농가의 피해조사를 통해 밝혀진 피해액을 과학적인 투쟁근거로 제시하는 한편 회유와 인간질에 말려들지 않도록 농민들의 재결속을 다짐하는 것일 뿐만 아니 라 농협 및 경찰의 회유와 억압을 거부하고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대책위원들은 결의문을 선포한 후 부락유지들을 앞세운 농협 및 경찰의 회유와 무마책으 로 인해 이완된 농민들의 결속의지를 더욱 다지기 위해 월 일과 일 이틀 동안 각 마을1 14 15 을 돌며 대책위원회의 활동목적을 홍보하면서 왜 농민들이 이렇게 당하기만 해야 하는가라는‘ ’ 의식을 적극 일깨우고 다녔다 이에 대해 농협은 물론 경찰은 사상이 의심스러운 행동이라며. ‘ ’ 대책위원들을 겁주고 매도했다 그런 가운데 농협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고 있. 었다 결의문에서 지적한 월 일까지의 회신기한조차 무시해 버렸다 농민들의 요구가 일방. 1 18 . 적으로 깔아뭉개진 것이다 그러면서 함평경찰서의 형식적인 주선으로 농민대표와 농협이 자. 리를 함께 하기도 했지만 농협이 무슨 돈이 있겠느냐며 결국 거부했고 경찰은 농협을 응원하‘ ’ 며 농민들에게 일방적인 철회만을 강요하고 나왔다. 이렇게 함평고구마피해보상 문제는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겉돌고 있었다 드디어. 한국가톨릭농민회가 들고 일어났다 한국가톨릭농민회 전남지구 연합회는 년 월 일. 1977 1 31 오후 시 광주가톨릭회관에서 대책회의를 열고 다음 개항을 결의하였다2 4 . 우리의 태도와 의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1) . 각각 해당 단위조합에 가서 싸운다2) . 사회여론화하고 언론을 통해 권익을 주장한다3) . 최후에는 법정투쟁을 벌인다4) . 386) 함평농협은 대책위원회의 의지가 적극적으로 드러난 데다 여기에 가톨릭 등 종교단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년 월 일 해명서를 농민들이게 돌려 농민들의 마음을1977 3 3 ‘ ’ 돌려보고자 했다 그러나 이 해명서에는 자기들의 잘못이 하나도 없다는 변명만을 늘어놓고. ‘ ’ 농민들을 위해 할만치 했다는 투였다 우선 신한제분과의 계약에 따라 당초 수매예정이던 만. 1 톤 이외 톤을 추가해 모두 만 톤을 수매했기 때문에 할일을 다했다는 것이2,000 5,000 1 7,201 다 특히 톤 중 톤 만 부대 은 영광 곡성 영암농협에 알선하여 수매토록. 5,000 1,200 (1 2,000 ) ㆍ ㆍ 했다며 자신들의 노력을 강조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만 톤을 수매한 결과 농촌에는 더. 1 7,201 수매할 고구마가 없다며 다음과 같은 년산 고구마사업현황을 공개했다1976 . 385) 한국정치상연구회 년대 강압정치와 민중항쟁운동 동광출판사 쪽 재인용, -70 , , 1988, 69 .大命『 』 386) 한국정치상연구회 년대 강압정치와 민중항쟁운동 동광출판사 쪽, -70 , , 1988, 70 .大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