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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다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며 무성의한 답변만을 되풀이 했다 농협으로의 계통출하가 사’ . 실상 좌절됐음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 농민들은 앞을 다투어 폭락한 헐값으로라도 팔고 자 안간 힘을 쏟았다 더 썩기 전에 한 푼이라도 건져야한다는 절박감 때문에 부대 당. 원 원에 거래하기도 했다 서로 자기 고구마를 팔기위해 같은 마을 농민들끼리 다400 , 500 . 투거나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심지어 대동면 백호리 백년마을 김일두 당시 세 씨는. ( 29 ) 상인들의 트럭 밑에 누워 내 고구마를 사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 고 떼를 쓰는 등 비슷‘ ’ 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377) 농협의 입장이나 이유야 어디 있건 힘없는 농민들만 농협에 농락당한 신세가 되었고 상인들에게 애걸복걸해야하는 비참한 꼴이 되었다 그런데. 도 농협은 할 만큼 했다 자금이 없다 우리의 잘못이 없다 며 농민들의 요구를 거들떠보‘ ’ ‘ ’ ‘ ’ 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이를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 있는 일이 아. 니었다 외침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높여나가기로 했다. . 고구마피해보상대책위원회 발족과 피해조사2. ‘ ’ 자신이 고구마농사를 지으며 직접 겪고 있던 대동면 금산리 서경원 당시 세( 41 )徐敬元ㆍ 함평가톨릭농민회장은 이대로 좌시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월 일 몇몇 농민대표와. 11 18 함평가톨릭농민회 회원 여명을 만나 대책을 논의한 다음 일 명을 함평읍 함평리 청하10 23 17 식당으로 다시 모이게 하여 함평고구마피해보상대책위원회 이하 대책위원회로 약칭 를 발족‘ ( , )’ 시켰다. 378) 위원장은 자신이 맡았다. 우선 대책위원회는 출범직후부터 월까지 함평군에서 가장 피해가 많은 함평읍 석성리12 성곡마을 농가 함평읍 장년리 백련마을 농가 장년리 월선마을 농가 장교리 월봉마을5 , 20 , 30 , 농가 대동면 백호리 백년마을 농가 금산리 과목장마을 농가 신광면 가덕리 가덕마을24 , 44 , 7 , 농가 월야면 정산리 신기마을 농가 학교면 월산리 화산마을 농가 등 개 읍면 개12 , 23 , 14 5 9 마을 농가에 대한 피해실태를 조사했다 그 결과 농협이 공시한 수매 값 부대 당 원179 . ( 1,317 ) 대로 수매하지 않음으로써 입게 된 손해가 약 만원 수매를 기다리다 썩어버린 부대280 , 223 값 만 원 등 피해액은 모두 농가 만 원으로 집계되었다 조사대상 농가당 평균29 179 309 7,085 . 만 원이었다1 7,302 . 379) 함평군 내 년산 고구마 피해손실내역76 380) 377) 한국정치상연구회 년대 강압정치와 민중항쟁운동 동광출판사 쪽, -70 , , 1988, 62 .大命『 』 378) 대책위원회 발족에 앞서 군내 전체 피해 농가를 조사한 후 그 결과를 보고하고 정식 발족하려 했으나 당국 의 방해로 조사를 실시하지 못한 채 출범했다 년 월 일 서경원 증언(2009 6 2 , ). 379) 당시 함평군내 고구마 생산농가는 농가였다 그런데도 개 마을 농가밖에 조사하지 못한 것은 농7,169 . 9 179 협은 물론 경찰 등 관계기관에서 농민회 및 대책위원회 활동에 대한 방해는 물론 참여농민들을 마을과 집까지 찾아다니며 사상이 불순한 사람 산에서 나무 한 가지 베어다 땔 줄 아느냐며 협박하고 방해함으로써 대부분‘ ’ ‘ ’ 의 생산농가들이 두려움을 느낀 끝에 대책위원회 참여는 물론 피해조사마저 불응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참가한 농가들만을 대상으로 벌였기 때문이다 년 월 일 노금노 증언(2009 8 1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