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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제 편8 ┃ 대한민국시대의 함평 유신독재시대의 함평고구마사건  들어가는 말 함평고구마 사건은 년 월부터 년 월까지 개월 동안 박정희 유신정권을1976 11 1978 4 18 상대로 벌인 농민운동이자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한국현대사의 한 장르였다. 년 늦가을 전남 함평군 함평 대동 신광 월야 학교 등 개 읍면 개 마을 여1976 5 9 180ㆍ ㆍ ㆍ ㆍ 농가농민들은 농협이 당초 약속한 고구마 전량수매를 이행하라며 고구마피해보상운동에‘ ’ ‘ ’ 착수한 후 년 월까지 개월 동안 줄기차게 벌였다 해당기관인 함평군농협은 자신1978 4 18 . 들의 잘못된 약속으로 인해 농민들이 열심히 피땀 흘려 지은 고구마가 제 값을 받지 못하 고 무단하게 썩거나 아주 헐값으로 방매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도 방관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오히려 농민들을 협박하고 이간질하는 비열한 수법으로 깔아뭉개고 나섰다 당. 시는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전면 부정하면서 극단적으로 억압하던 시기였다 유신독재 체제의 경찰은 농민들의 피해와 억울함을 외면한 채 사상이 불순하다. ‘ ’ 며 오히려 함평군농협을 편들면서 농민들을 핍박했다 분노한 농민들은 감연히 일어섰다. . 그러나 유신독재체제의 농협과 경찰이 치졸하게 협박하고 방해함으로써 대부분의 농민들 은 투쟁대열에서 이탈하고 겨우 농가만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채 버티어냈다 여기179 . 에 전국적 농민운동단체인 가톨릭농민회가 뒷밭침하고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기관들이 거 들었다 그런데도 피해보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개월의 세월이 걸렸다 그것도 단식이. 18 . 라는 극단적 수단까지 동원한 끝에 간신히 성사시킨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당시 오만하고. 서슬 퍼런 유신독재정권에 대항해서 싸운 끝에 거두어 낸 성과라는 데서 또 다른 의미가 부여되었다 문제는 고구마를 계통수매하기 시작한지 년밖에 되지 않아 아직 고구마수매. 2 업무가 정착되지 않은 시행착오적 과실이 불가피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농민을 위한다는 농협이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개선하려는 진솔한 노력을 보이지 않은 채 무조건 농민들을 무시하려는 비민주적 반농민적 성향이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는ㆍ 점이 더욱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발생원인1. 전남에서 무안 해남군과 함께 고구마주산지인 함평군 내의 년 고구마재배면적은1976ㆍ 농가에서 헥타르에 이르렀다 이는 전년도의 헥타르에 비해 재배면적이7,169 1,296 . 1,100 가 늘어난 데다 풍작으로 인해 전년도 만 톤보다 여 톤이나 증산된 만17.8% 2 5,000 2 여 톤이 생산되었다 이는 흉작으로 인해 시중 고구마 값이 전 해보다 가량 오5,000 . 30% 른 데다 농협도 이에 덩달아 수매 값을 관들이 부대 당 원 등 기준 으로15 1,317 (2 )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