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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김홍집 내각은 1895년 11월 15일에 「단발령」을 선포하였다. 이때 내세운 명분은 ‘위생에 이 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교 윤리가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 깊 이 뿌리 내리던 조선 사회에서 상투는 곧 인륜의 기본인 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 로 단발령이 내리자 유생들은 이것을 신체적 박해로, 더 나아가 인륜의 파멸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반감은 절정에 달하였다. 단발령 공포는 백성들의 뜻과는 배치되는 일부 매판관리 집 단에 의한 자의적 조치였다. 학부대신 이도재마저도 단발령이 공포된 직후 사직 상소를 올리 고 단발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단발령이 사회적·문화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처사임을 비난하였다. 또한 정계에서 은퇴한 김병시도 단발령 철회를 호소하는 상소 를 올렸다. 그는 단발령이 일제의 사주를 받은 부일파들의 소행임을 지적하였다. 단발령에 대한 재야 유생들의 반향은 더욱 커 극단적인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단호한 행동 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단발령이 반포된 다음날로 의병 투쟁의 기치를 들고 울분을 토로한 남한산성 의병장 김하락(金河洛)은 재야 유생의 입장을 대변한다. 유인석도 이러한 단발령에 대하여 변복령과 동일한 차원에서 화이론적 가치관에 입각해 통박하였다. 그는 상투와 ‘원몌 (圓袂 ; 둥근 소매)’의 수호 여부에 따라 화이(華夷)와 인수(人獸)의 결판이 난다고 보았다. 즉 상투와 원몌가 화(華)와 인(人)을 상징하고 수구와 자주를 의미한 데 비해 삭발과 변복은 이 (夷)와 수(獸)를 상징하고 개화와 예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유교 통념의 사회에서 단발령은 한민족의 문화적 자존의 표상이던 상투를 제거함으로 전 국민의 울분을 자아냈다. 강요된 단발령은 결과적으로 정치·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걸 쳐 큰 혼란을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단발 강요에 대한 반감은 개화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 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또 일본화로 받아들여져 반일 의식으로 연결될 수가 있었다. 즉 유생 들은 개화를 상징하는 단발령을 인륜을 파괴하여 문명인을 야만인으로 전락케 하는 처사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전통질서를 수호하려는 유생들은 반침략·반개화의 의병을 봉기하여 이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2. 의병의 역사적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