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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봉기하여 활발히 항쟁하였다. 이들 의병부대는 춘천·원주·강릉 등을 서로 오가면서 활동 하였다.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중에 비교적 규모가 큰 부대로 연기우·김춘수·이종 협·김억석·조북동·채응언·유학근 등이 있다. 장기 항전을 주도한 의병으로는 김광옥· 최도환·정경태·연기우·강두필·김상태·이태영 부대가 있으며, 일본 군경과의 전투횟수 가 많았던 부대로는 김광옥·최도환·유학근·이종협·김억석·조복동 부대가 두드러졌다. 일본군의 의병에 대한 탄압은 혹독했다. 의병의 근거지라고 하여 용문사와 상원사·사나 사 같은 유서 깊은 사찰은 물론 양평·제천 등지의 수많은 민가를 소각시켰다. 또한 체포된 의병들에 대하여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단순 가담자라 하더라도 2∼3년의 유배형에 처해졌 으며, 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은 ‘폭동죄’와 ‘내란죄’를 적용하여 사형이나 10년 이상의 유배형 을 받았다. 경기·강원 지역 의병장 중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한 의병장으로 허위와 이 인영을 비롯하여 김봉기·김수민·이은찬·신현구·정용대 등이 보인다. 의병을 근절시키 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중형을 부과하였기에 희생이 더욱 컸다고 보인다.91) 의병의 강력한 반일 투쟁은 일제의 식민화 정책을 지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일제는 1909년 후반 경 조선을 강점하려 하였으나, 의병 투쟁이 장기화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 였다. 결국 일제는 대규모의 군대를 투입하여 의병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이후에야 조선을 식 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 5. 중부 지역 의병 항쟁의 의미 91)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의 의병 관련 판결문은 의병을 ‘폭도(暴徒)’·‘난도(亂徒)’ 등으로, 의병장을 ‘폭도의 수괴(首魁)’·‘거괴 (巨魁)’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군자금 조달이나 모금 활동을 약탈로 규정하는 등 일제에 대한 항거를 의도적으로 폄하하고 있다. 따라서 의병 운동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재판 기록’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