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page

91 유인석을 총수로 하는 제천의병은 전기 의병사에서 최대의 의진으로 평가된다. 제천의병 은 충주성을 점령하고 충북을 비롯하여 충남·강원·경북의 인접한 지역을 아우르는 세력 범위를 형성하였다. 의병에 비협조적인 개화파 관리를 처단하였으며, 수안보와 가흥에 주둔 한 일본군의 진영을 급습하여 타격을 입혔다. 일본군이 설치한 군용전신선을 절단하였으며 일본군 수비대와의 교전도 감행하였다. 제천의병은 관군이나 일본군과의 항전에서 많은 이 가 전사하거나 현장에서 모두 총살당하는 등 치열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5년 충청의병은 재기하였다. 1905년 8월 충북 단양 지방에서 정운경과 박정수가 의병 을 일으켰으나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유학자 박세화(朴世和)도 문인인 윤응 선과 함께 제천의 남현에서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켰다가 청풍에서 체포되었다. 1896년에 홍주의병을 주도하였던 안병찬·채광묵·박창로·이세영 등은 을사5조약의 늑결 직후에 청양의 정산에 거주하던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하고 홍주의병을 재기하였다. 이들 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는 이를 몇 차례 공격했으나 홍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통감 이토가 일본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함에 따라 일본군 2개 중대가 서울에서 파견되어 홍주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공 격을 감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 수백 명이 희생되고 체포되었다. 체포된 곽한일을 비롯 하여 박윤식·김덕진·정재호·황영수·박두표 등은 ‘종신 유배형’을 받고 지도로, 홍순대 와 김재신은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 안병찬·박창로·최선재·윤자홍 등 수십 명은 공주 감옥에 감금되었다. 유병장 유준근을 비롯하여 최상집·이상구·안항식·남규진·신보균· 이식·문석환·신현두 등 9명은 대마도로 유배되어 이즈하라(嚴原)에서 감금생활을 하였다. 민종식도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 유배형’에 처해져 진 도에 종신 유배되었다. 당진 지역도 을사조약의 늑결에 항거하여 즉각적으로 의병을 봉기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 인 당진 의병장으로는 최구현과 정주원 등이 있다. 최구현은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옥고를 겪어 순국하였다. 정주원은 7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진의 홍일초 부대는 소난지도에서 일본 경찰대와 항전했으나, 무기의 열세로 의병대 거의 전원인 100여 명이 희생되는 참극을 입었다. 충북 지역의 의병장으로는 제천 지역에서 활동한 이강년과 청주 지역의 한봉수와 단양 지 역의 김상태가 있다. 특히 이강년은 문경 출신으로 제천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5. 중부 지역 의병 항쟁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