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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5. 중부 지역 의병 항쟁의 의미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갑오변란과 청·일 전쟁을 전후하여 일제에 의한 군사적 위협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에 따라 1894년 이후 조선인들은 반침략을 시대 적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의병을 조직하여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한 피의 항쟁을 전 개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의병 항쟁은 한민족의 반침략·반개화 투쟁이며 아울러 국권 침 탈 이후 독립전쟁을 일으키게 한 정신적·인적 연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는 실로 크다 하겠다. 한말 의병의 시기 구분은 2시기, 3시기, 또는 4시기로 구분하여 설명되기도 하나 이 글에 서는 전기 의병(1894∼1896), 중기 의병(1904∼1907. 7), 후기 의병(1907. 8∼1915)의 3시기 로 구분하였다. 전기 의병은 1894년 6월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침범한 갑오변란과 을 미사변, 단발령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일어났으며, 중기 의병은 1904년 2월 개시된 러· 일 전쟁과 그 직후에 체결된 한일의정서 그리고 1905년 11월 강제 늑결된 을사5조약 등과 같 은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 때문이었고, 후기 의병은 1907년 7월의 고종의 강제 퇴위와 1907 년 8월 1일 구한국군의 강제 해산이 직접적 요인이 되어 봉기하였다. 이 글에서는 한말 중부 지역(충청·경기·강원)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동과 대표적인 의병 장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인물들의 판결문 내용을 검 토하여 활동상을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하였다. 중부 지역 중 충청 지역에서는 전기 의병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최초의 을미의병이 대전의 유성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대구 출신으로 진잠현감을 역임한 문석봉은 1895년 9월 명성황 후의 원수를 갚고자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공주부에서 파견한 관군과의 항전에서 패 퇴하여 경상도로 내려가 재기를 도모하던 중에 대구부에서 파견한 순검에 의해 체포되었다 가 탈옥하여 원주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중에 병으로 순국하였다. 충남의 홍성 지역에서는 승 정원 승지를 지낸 김복한과 이설 등이 재지 유생인 안병찬 등과 홍주성에서 의병을 봉기하였 다. 비록 홍주관찰사 이승우의 변심으로 체포되었지만, 이들의 항쟁은 1906년 홍주의병으로 계승되었다. 김복한을 비롯한 이설·안병찬·송병직·홍건·이상린 등 6명은 서울로 압송되 어 고등재판소에서 유배 10년, 징역 3년 등의 판결을 받았으나 고종의 특지로 석방될 수 있었다.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