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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⑲ 정영운과 이재복 정영운(鄭永雲, 1879~1910)은 경기도 지평에서 태어나 양근군 남시면 상백석동에 거주 하였다. 임행숙 의진에 가담하여 동료의병 100여 명과 함께 각지를 다니면서 활약하던 중 1907년 11월 1일에 경기도 여주군 홍곡면 충신동 산 속에서 여주경찰서 소속 순사 5명을 만 나 와타나베(渡邊卷太郞) 등 4명을 사살한 뒤 의병 활동을 계속하다가 체포되었다. 1910년 2 월 1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고 항소하였으나, 3월 1일 경성공소원에서 교 수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88) 1991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재복(李再福, 1881~ ? )은 양평의 지평 상동면 삼상리 출신으로 직업이 농업이다. 1908년 3월부터 7월까지 이정숙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일본수비대 와 총 4회의 전투를 수행하는 등 치열한 반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08년 9월 1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유형 7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89) 정부에서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여 공을 기렸다. ⑳ 이성서·이창준 부자 이성서(李聖瑞, 1856~1909)는 지평의 양곡 출신으로, 1909년 당시 경성의 중부 소립동에 거주하였으며, 직업은 미장이었다. 1907년 음력 7~8월경에 정재학(鄭在學) 의병에 들어갔 으며, 8월 1일(음) 정재학 의병장을 비롯하여 80여 명과 함께 총기로 무장하고 경기도 적성 군과 마전군 등지에서 활약하던 중 일본인 약상인 기시모토(岸本源四郞)를 총살하였다. 같 은 달 신중원과 의병을 거느리고 경기도 삭녕군 읍내에서 주사 모씨로부터 총 30정과 탄약 5 근, 돈 160원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아들 이창준(李昌俊)과 함께 황해도 토산군 토산시장에서 동장과 집강 등을 붙잡아 220원을 모집하고 군청의 이방을 위협하여 탄약 1상자와 탄환 3천 발을 탈취하였다. 1909년 11월 1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이성서는 강도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14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으며, 이창준은 징역 2년 6 개월에 처해졌다. 90) 이성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88)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50, 169쪽. 89)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215쪽. 90)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31∼133쪽. 4. 경기·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