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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또 하나의 격문은 오빈동 공산리 주민에게 보냈는데 의병의 대군이 근일 양근(陽根)을 습격하려 한다. 고로 처자가족(妻子家族)은 피난하라. 또 화약 탄환을 준비하기 어렵거든 짚신과 양식을 준비하라.83) 라고 하여 의병부대가 곧 양근을 공격할 것을 알리면서 의기있는 이들의 의병 참여를 요청하 였다. 아울러 주민들에게 화약이나 화승총 또는 짚신이나 양식을 준비해 줄 것도 요구하였으 며,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위대원은 참살할 것임을 경고하였다. 그는 북면에서 의 병 귀순자 3명을 잡아 가평군 남면으로 끌고 가 처형하기도 하였으나 1908년 4월 19일 가평 수비대장 나이토(內藤) 중위에 의해 가평군 청평천의 북쪽 구정리에서 체포되었다.84) 그가 이후에 어떻게 탈출했는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1909년 12월 양주경찰서에 자수하였다.85) ⑱ 이춘명과 박광천 이춘명(李春明)은 강원도 양구 출신으로 양평군 용암리에서 거주하였다. 1910년 현재 33 세로 직업은 ‘농업 겸 뱃군’이다. 1907년 9월경(음력)부터 김춘수 의병진에 가입하여 활동하 였다. 같은 해 12월 양근분견소에 자수하였다가 다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2월 14일(음력) 고정복·신원영·이천보 등과 함께 남시면에서 군수품을 탈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춘명은 이 일로 체포되어 1910년 4월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86) 박광천(朴光天, 1854~1910)은 1907년 8월(음력) 김상진 의진에 참여하여 강원도 홍천군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8월 20일(음력) 같은 해 홍천군 동신대 동은교동에서 친일 밀고자 김 윤여를 김상진의 명령에 따라 화승총으로 총살하였다. 그 후 이 일로 체포되어 1909년 11월 2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경성공소원과 고등 법원에 항소하였으나 12월 23일과 1910년 1월 27일 각각 기각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 다. 정부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87) 83) 「폭도에 관한 편책」,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0, 143쪽. 84) 「폭도에 관한 편책」,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0, 149, 151쪽. 85) 「폭도에 관한 편책」,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7, 342∼343쪽 : 김순덕, 『경기지방 의병운동 연구』, 한양대 박사학위논문, 2003, 42쪽. 86)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53쪽. 87)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35∼137쪽.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