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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득수 의병의 행적은 1907년 음력 9월까지는 확인된다. 1909년 3월 16일 경기도 관찰사 김사 묵이 내부대신 박제순에게 보고한 『폭도사편집자료』에 의하면, 권득수에 대하여 “현재 소재 불명인 바 일설에는 부하에게 살해되었다고도 전한다”78)고 하였으나 사망 일시와 경위는 지 금까지 알 수 없다. 79) 권득수가 용문사 일대에서의 활동할 때인 1907년 8월말 인근의 오촌리 김윤구의 99간 저택이 권득수 의병에게 무기와 군량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불태워지기까 지 하였다. 80) 정부에서는 1986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하였다. ⑰ 김춘수 김춘수(金春洙, 1874∼1952)는 양근군 북면 소설리 출신의 유생으로,81) 본명은 노수(일명 병수), 본관은 광산이다. 1874년 8월 옥천면 신복리에서 부친 영석과 모친 고성 이씨 사이에 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8월 이후 홍천에서 창의하여 200여 명을 인솔하고 양 평·여주·광주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참모장에 백영기, 종사에 김응서·이연년이 있다. 그 리고 의병으로 이춘명·이천보·고정복·신원영 등이 확인된다. 김춘수는 허위 부하인 김규 식 등과 연계하여 1907년 12월 13도창의진에 안무장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20여 명의 의병 을 이끌고 1908년 4월에 양근군의 북면으로 들어가 4월 8일자로 된 두 종류의 격문을 각지 에 보냈는데, 그 중 하나가 양근군 북면 면장과 각 동장에게 보낸 것이데, 격문의 내용은 다 음과 같다. 근처에 왜적(倭賊)이 있어서 세력이 왕성하다. 그러나 의병이 재거(再擧)하고 또 청국병도 역 시 동(動)하여 아 국민은 소생할 수 있을 것이다. 화약과 화승을 준비하라. 자위대장(自衛隊 長)은 참살한다. 문무(文武) 중에 의기 있는 자는 의병에 투(投)하라 82) 78) 『독립운동사자료집』 3, 507쪽. 79) 「폭도사편집자료」에 의하면, 황재호(黃在浩) 약 37세, 포천군 산내면)에 대한 기록 중에 “그해(1907년, 필자) 9월 상순 적성군 폭도 권 덕수(權德洙)라는 자로부터 더불어 일을 일으키자는 꾀임을 받았으나 일단 응낙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이미 폭도의 수괴로써 행동하려는 의사가 있었다. 그 후 도당을 모아 권덕수와 합동하였으나 서로 불화하여 마침내 권덕수를 살해하고 스스로 수괴가 된 자로서”(『독립운동사자료집』3, 509~510쪽)라고 하여 권덕수가 황재호(黃在浩, 보병 하사 출신)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보고 되어 있다. 이때의 권덕수(權德洙)가 권득수(權得洙)가 아닌가 한다. 80) 김윤구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독립운동사자료집』 5, 491쪽). 81) 「폭도사편집자료」, 위책, 506쪽. 82) 「폭도에 관한 편책」,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0, 143쪽. 4. 경기·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