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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개척하여 선교 활동과 문맹퇴치에 헌신하는 김연옥(金演玉)을 만나 동지가 되어 구국을 위한 창의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젊은이를 모집하고자 하였으나, 김연옥으로부터 교회보다 시장에서 의병을 모집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가산을 정리하여 무기를 구입한 그는 소장수로 가장하고 양평·양주·이천의 장날을 택하여 격문을 붙이고 창의하였다. 그가 창의한 때는 1907년 음력 7월로 보인다. 용문산을 근거지로 하여 양평·양주·이 천·지평 일대에서 200명이 넘는 의병진을 편성하는데 성공하였다.73)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고자 양평군 양서면 문호리의 나루터를 도강하려 했으나 일본 기병대에 발각되어 치 열한 격전을 치렀다. 이 전투에서 일본 헌병 2명을 사살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용문산으로 후퇴하였다. 용문사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조인환 의진과 함께 활동하던 권득수 의병은 1907년 8월 일 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의 급습을 받았는데 8월 23일 양근에 도착한 9중대는 24일 의 병의 근거지인 용문사를 불태웠다. 74) 이에 의병은 상원사와 운필암으로 후퇴하면서 항쟁하였다. 이는 8월 말(음력 7월 23일)에 양근의 수회리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을 하였다거나 8월 31일에 해산 군인인 김성완(金聖完) 이 수회리에서 권득수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갔다는 진술 등으로 뒷받침되며, 이를 보면 권득 수는 매일 의병들에게 급료까지 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75) 이후 권득수는 9월 8일(음, 8월 1 일)에는 양주의 회촌으로 가서 그곳에 거주하는 신재만에게 국가를 위하여 창의할 것을 권 유하고 자금 5만원과 양총 및 조총 등 13정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76) 권득수는 1907년 9월(음 력) 원주의병장 민긍호 부대를 비롯하여 장기환(張箕煥) 의병·최두환(崔斗煥) 의병·한갑 복(韓甲福) 의병·박래봉(朴來鳳) 의병·주석민(朱錫敏) 의병 등과 연합하여 인제군 일대에 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 연합의병이 1만여 명에 달했다는 신창현의 진술77)로 보아 권 73) 조선총독부 경무국 편, 「폭도사편집자료」(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3, 507쪽). 이 자료에 의하면, 권득수를 “소 장사를 하던 자인 바 한때 부하 200여 명을 인솔하고 지평·양근·이천·양주의 각지를 배회 출몰하여 현재 소재 불명인 바 일설에는 부하에게 살해되었다고 전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74) 「조선폭도토벌지」, 『독립운동사자료집』 3, 692쪽. 75)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2쪽, 「김성완판결문」. 김성완은 체포되어 1907년 11월 5일 유배 7년형을 선고받았다. 76)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2-13쪽, 「판결서 형제 46호 56호」. 77)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69쪽. 이 자료에 권득주(權得珠)라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권득수(權得洙)의 오기로 보인다. 신창현은 1908년 6월 18일 (음, 5월 20일) 체포되어 9월 15일 종신유형을 선고받았다.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