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age

83 이 묘연하자 잔여 의병들은 해산 군인인 신창현(申昌鉉)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활동하였다.70) 조인환은 그 후에도 이천·여주 일대에서 활동을 계속했지만 1909년 12월 20일 군수품 배분 문제로 불만을 품은 자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정부에서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 ⑫ 이연년 이연년(李延年, 1874~1944)은 이승룡의 장자로 1874년 12월에 양근의 대흥리에서 태어났 다. 초명은 목년(穆年)이고 자는 경문(敬文), 호는 송석(松石)이다. 벼슬은 부사과에 올랐다. 그는 선친이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을 점거하였다가 적에게 살해당한 후 항상 왜놈을 증오 하고 복수심에 불탔다. 그는 1907년 일제가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사건을 일으키 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해 7월 초순경(음력) 양근에 거주하는 민기희(閔基熙)가 “현 재 정부 대신의 국가를 그르치는 것이 이처럼 심하여 강토와 생령이 회복할 여지가 없게 되 었으니 의병을 일으켜 일본인을 물리치고 구제도를 회복하려 하니 그대가 두령이 되어 큰 일 을 이룩하자”고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이에 이연년은 이들을 이끌고 활동을 개시하였으며 지평의 우곡에서 김춘수 의진에 합류하여 종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보름께 홍천의 남창에서 12월초에는 여주의 천양에서, 12월 보름께는 홍천 의 각길리에서 일본군과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8년 정월(음력)에는 귀순한 의병장 정대 무(丁大武)의 선봉장 김응서와 함께 지평의 황경평에서 의병을 재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후 대송면 곡수에서 한인 순사 김연상을 살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08년 3월 청운면 삼성리의 벗고개에서 일본군 수비대와의 치열한 전투 중에 유탄을 맞아 부상을 입고 체포되 었다. 지평옥에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다가 서울로 이송되어 그해 5월 22일에 평리원에서 ‘내란죄’로 유배 10년형을 선고받고 완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유배 후에는 대흥리 본가 에 대곡서당을 열고 후학을 지도하였다.71) 정부에서는 1986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 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70) 『독립운동사자료집』 3, 727쪽 ; 『독립운동사』 1, 538쪽. 71) 「폭도사편집자료」, 『독립운동사자료집』 3, 509, 734쪽 ;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17∼118쪽. 4. 경기·강원 지역의 의병 활동